세고비아 맨발 가르멜 수녀원에 있는 데레사 성녀상.
유럽 중세 교회의 혁신은 끊임없는 성찰로 영적 위기의 순간을 극복한 인물들로 인해 이뤄질 수 있었다. 데레사(Teresa) 성녀로 대표되는 스페인 영성가들의 치열한 삶이 그러했다. 16세기 스페인 전역을 돌며 수도회 개혁을 주도한 데레사 성녀는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은 위대한 신비가였고 교회학자였다. 하느님의 딸로, 교회의 진정한 딸로 살고자 했던 데레사 성녀의 정신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세계 곳곳에 큰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 스페인관광청 도움으로 스페인 현지 곳곳에 새겨진 데레사 성녀의 발자취를 둘러봤다.
■ ‘교회의 딸’ 태어난 고향 아빌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85㎞ 떨어진 아빌라(Avila). 아빌라는 데레사 성녀가 나고 자랐으며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처음 세운 곳이다. 언덕길을 오르다보니 데레사 성녀가 태어난 생가 터에 건립된 생가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당 바로 옆은 성녀가 세운 맨발 가르멜(Carmelitas Descalzos)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과 수도원을 함께 ‘라산타’(La Santa, ‘신성한’이라는 뜻)로 부른다.
성당 내부에는 성녀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순간들이 그림으로 묘사돼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현시 순간을 비롯해 현시를 통해 나타나 데레사 성녀를 위로해준 성모님과 요셉 성인, 수녀원에서 영적 결혼 은총을 받는 데레사 성녀의 모습 등이다.
생가 성당과 수도원 옆에는 ‘데레사 성녀 박물관’이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데레사 성녀가 집필한 「자서전」, 「완덕의 길」 등 주요 작품이 전시돼 있고 데레사 성녀를 기념해 스페인 정부에서 발행한 우표 등도 진열돼 있다. 유리벽 너머로는 성녀가 태어난 방을 재현해 놓기도 했다. 박물관 안쪽에 있는 작은 정원에는 데레사 성녀가 어린 시절 오빠 로드리게스와 함께 기도하며 노는 모습이 석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데레사 성녀(1515~1582)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또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불린다.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신비가이자 교회학자다. 선종 40년이 지난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그녀를 성인으로 선포했고 1970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기도 했다. 교회 사상 첫 여성 교회학자인 데레사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을 만나기를 간구했고 “나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영성의 울림으로 승화됐다.
1535년 아빌라 강생(Encarnacion) 수녀원에 입회한 데레사 성녀는 끊임없이 기도를 수련했다. 그러던 1554년 사순절에 수난하시는 예수님 상을 보고 회심한 후부터 하느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많은 신비체험으로 영적 여정의 전환점에 들어선 성녀는 스페인에서 열악한 선교지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수도원 17개를 세우고 관상생활과 고행으로 ‘영혼 구혼’에 나섰다. 데레사 성녀가 세운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회원들이 한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며 세속의 모든 유혹과 욕구를 떨쳐버린다.
■ 어려움에도 수도원 창립했던 세고비아
스페인 세고비아(Segovia)에 들어서자 먼저 거대한 규모의 로마식 수도교가 보인다. 수도교를 따라 언덕 쪽으로 들어가면 중앙 광장에 세고비아 주교좌성당이 들어서있다. 타 유럽 도시의 대성당들이 직선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라면 세고비아 주교좌성당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뤄져 푸근한 인상을 준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데레사 성녀가 9번째로 세운 맨발 가르멜 수녀원이 있다.
‘죽어서도 나올 수 없다’고 일컬어지는 봉쇄 수녀원답게 입구는 두꺼운 문으로 잠겨있다. 바로 옆에는 수녀원 안쪽과 바깥쪽을 잇는 쇠줄이 있는데 이를 잡아당기면 종이 울리며 안쪽에서 담당자가 문을 열어주는 식이다.
데레사 성녀는 1574년 세고비아에 수녀원을 창립하기로 했다. 기도 중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창립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난관은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텃세였다. 데레사 성녀는 세고비아 교구장과 시의회로부터 수녀원 창립과 관련한 구두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세고비아에서 창립 미사를 봉헌한 뒤 세고비아 총대리 신부가 미사를 봉헌한 십자가의 성 요한을 끌고가 감옥에 가두려 하고 추후 미사도 금지시킨 것이다. 세고비아 맨발 가르멜 수녀원 창립에 큰 도움을 준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라나다 수도원 원장으로 재임하다 “멕시코로 가라”는 총장 신부의 명을 받게 된다. 일종의 유배였던 셈이다. 멕시코로 가기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가 세운 세고비아 맨발 가르멜 수도원에 안치됐다. 이 또한 영혼 구혼이라는 대장정에 나선 데레사 성녀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과 역경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산골짜기 작은 마을 파스트라나
스페인 파스트라나(Pastrana)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100여㎞ 떨어진 이 곳으로 오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한 황토색 골짜기 뿐이다. 과연 500년 전 이 곳에 6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을 세운 데레사 성녀도 ‘벽촌’이라고 묘사했던 곳답다.
하지만 골짜기 경사면을 따라 형성된 마을에 들어서자 고풍스럽고 세련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데레사 성녀가 이 곳을 찾았을 당시 마을 영주 아내인 에볼리 공주는 어마어마한 저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569년 에볼리 공주는 데레사 성녀에게 파스트라나에 자신이 후원금을 지원하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해줄 것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다른 지역 수녀원 창립 문제 등이 걸려 있어 난색을 표했던 데레사 성녀는 성체조배를 하던 중 “단순한 수녀원 창립이 아니니 꼭 가야한다”는 그리스도 말씀을 듣고 창립을 결심했다.
스페인에서 벽지에 속하는 이곳 파스트라나에도 데레사 성녀 박물관이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1569년부터 1574년까지 사용된 가르멜 수녀원 건물 안에 최근 마련된 이 박물관에는 데레사 성녀와 관련한 여러 가지 그림과 소품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초창기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성 베네딕토의 마리아노 신부와 데레사 성녀의 모습을 함께 담은 그림이 눈길을 끈다. 데레사 성녀는 마리아노 신부를 위대한 학자 또는 영적인 아들로 여겼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에 의지해 산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찾아와 수녀원을 설립하고 성체조배를 했을 데레사 성녀를 떠올려본다. 이 곳 파스트라나는 데레사 성녀로 인해 작지만 큰 감동을 전해주는 성령의 마을로 탄생한 것이다.
아빌라 데레사 성녀 박물관 정원에 있는 오빠 로드리게스와 함께 기도하는 석상.
세고비아 주교좌성당.
스페인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