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아주 작은 바보 총각이 있었는데, 좁쌀 한 알을 챙겨 과거를 보러 갔습니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러 주인에게 좁쌀 한 알을 건네며, “이 좁쌀은 내 생명보다 귀한 것이니 잘 보관해 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장을 불러 어제 맡긴 좁쌀을 달라고 했더니,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쥐가 먹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바보총각은 화를 내며, “내가 그 좁쌀은 내 생명보다 귀한 것이라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소홀히 한 것이오. 그 귀한 좁쌀을 먹은 쥐라도 잡아서 내놓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겨우 쥐를 잡아서 바보 총각에게 주었고, 그는 쥐를 데리고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또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러 쥐를 맡기면서, 아주 귀한 것이니 잘 맡아달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주인장을 불러 맡겨놓은 쥐를 달라고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고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양이라도 달라고 하여 고양이를 데리고 한양 길에 올랐습니다.
길을 가다가 또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러 고양이를 맡기고 잘 좀 돌보아달라고 했지요. 다음날 아침에 보니 고양이가 당나귀한테 밟혀 죽은 거예요. 주인은 어쩔 수 없이 그 당나귀를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귀를 데리고 한양으로 가던 바보 총각은 또 날이 저물어 주막에 머물렀습니다.
주인에게 당나귀를 맡겼는데, 주인은 당나귀를 외양간에 소와 함께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당나귀가 함께 있던 소에게 받혀서 죽은 겁니다.
바보 총각은 당나귀를 받은 그 소를 데리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또다시 주막에 들러 소를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바보 총각이 소를 찾으니 소가 없는 거예요. 주막 주인장의 아들이 그 소가 자기네 소인 줄 알고 팔아먹은 거예요.
바보 총각이 하도 뭐라고 해서 돈을 후하게 쳐주겠다고 했지만 바보 총각의 대답은 단 하나였습니다. 자기 소를 자기 앞에 데려다 놓으라는 거였지요. 그래서 아들이 소를 판 정승 집을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소를 돌려달라고 하자, 소는 이미 다 잡아먹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보 총각은 그 소를 그대로 내놓으라고 했고 이를 본 정승은 그럼 그냥 우리 딸을 아내로 삼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좁쌀 한 알을 가지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난 바보총각은 정승댁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지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번을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일흔일곱 번이나 사백구십 번이나 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의 한계치를 너무도 벗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바보 총각이 했던 것처럼 눈앞에 벌어진 ‘딱 한 번’을 용서하는 것만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