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29) 프라 안젤리코(하)
겸손함과 순수함의 힘, 천사들은 새처럼 날아오르고
자만심과 거만함은 가라앉는 것 의미
스스로를 중시하기에 날아오르지 못해
작품에서 겸손의 영성 느낄 수 있어
프라 안젤리코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
■ 가벼움과 경쾌함의 영성
프라 안젤리코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되고, 그의 작품들을 즐기고 감상하면서 우리는 깊은 영성과 가식 없는 거룩함은 오히려 가벼움과 경쾌함과 부드러움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미술사가 바사리가 잘 통찰한 점이기도 하지요. 사실 영성을 말하면서 심각함과 엄숙함만을 과시하고 다른 이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지배하고 지시하려는 태도를 자주 보인다면 그것은 어쩌면 숨겨진 우월감이나 열등감, 공격성, 권력욕 같은 왜곡된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교회 역사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라 안젤리코 그림으로 만나게 되는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가벼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물과 정경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를 감상하며,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글이 있습니다.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로 너무나 유명한, 20세기 초엽에 활동한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고 가톨릭 신앙의 뛰어난 변론자였던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K. Chesterton, 1874~1936)의 대표작인 「정통(오소독시)」에 나오는 한 대목인데요, 여기서 체스터턴은 독자들에게 프라 안젤리코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영성의 본질이 부드러움과 가벼움과 경쾌함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 글을 쓰던 시기가 근대의 산업적, 경제적 발전에 따라서 사람들이 효율성과 기술적 진보로 대표되는 외적인 힘에 도취되었던 시기였으며, 사회 안에 허위의식이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들이 팽배해 있던 시대였음을 생각하면, 체스터턴의 문제의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통찰이며, 자주 언급되는 명문이기에 좀 길긴 하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재빠른 것이 가장 부드러운 것이다. 새가 활동적인 이유는 부드럽기 때문이다. 돌이 무력한 것은 딱딱하기 때문이다. 돌이 본질상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딱딱함은 곧 연약함이기 때문이다. 새가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허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힘 안에는 일종의 가벼움, 스스로 공중에 있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 기적의 역사를 연구하는 탐구자들은 위대한 성자들의 특징이 ‘공중부양’의 능력에 있는 것으로 엄숙하게 인정했다. 사실은 한 걸음 더 나갈 수도 있다. 위대한 성자들 특징은 가벼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직관이었고, 그중에서도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이었다. 프라 안젤리코가 모든 천사를 새로 그렸을 뿐 아니라 거의 나비로 그리다시피 한 것을 기억하라. 가장 진지한 중세 미술이 온통 가볍게 펄럭이는 휘장들로,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전 라파엘풍의 화가들이 진정한 라파엘 이전의 화가들을 닮을 수 없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번 존스는 결코 중세의 심오한 가벼움을 되살릴 수 없었다. 옛 그리스도교 그림들에서 모든 인물 위에 등장하는 하늘은 푸른색 내지는 황금색의 낙하산과 같다. 모든 인물은 위로 날아가서 하늘을 둥둥 떠다닐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거지의 누덕누덕한 외투는 천사의 번뜩이는 깃털처럼 그를 위로 끌어올릴 것이다. 반면에 무거운 금으로 장식한 왕들과 보라색 예복을 입은 거만한 자들은 그 본성상 아래로 내려앉을 것이다. 거만함은 가벼움이나 공중부양으로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만심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려 장중함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는 자기를 중시하는 쪽으로 ‘가라앉게’ 된다. 하지만 자기를 잊어버리는 쾌활한 쪽으로 올라와야 한다. 사람은 공상 속으로 ‘떨어지고’ 푸른 하늘로 올라온다. 자기를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상 쉽지만 잘못된 성행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좋은 농담을 쓰는 일보다 좋은 논설을 쓰는 일이 더 쉬운 법이다. 엄숙함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사탄은 중력에 의해 떨어졌다.”(G.K. 체스터턴, 「정통」(홍병룡 역, 상상북스, 2010), 240~241쪽)
■ 소박한 일상과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초월의 문턱
체스터턴은 프라 안젤리코가 상징하는 가벼움과 경쾌함과 부드러움의 영성과 미학이 동시대를 지배하던 병적인 정서와 생각들을 치유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해당될 것 같습니다.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좀 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영성과 신앙의 공기가 순환하게 하는데 있어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를 묵상하는 것은 적지 않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은 순수한 마음과 정화된 의지를 가지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그의 생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뛰어난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Antonio Tabucchi, 1943~2012)는 언젠가 프라 안젤리코에게 찬사를 보내는 짧지만 매혹적인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타부키는 프라 안젤리코의 소박한 성정을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로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을 수도원 입회시에 세속에 놓고 온 이름인 구이돌리노로 여기고 있던, 피에솔레의 지오반니 수사는 그날도 채소가 있는 정원에서 양파를 캐고 있었다. 정원 일은 그의 일이었고, 그가 세속을 떠나 수도원에 온 다음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 피에트로의 소명이기도 했던 이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지오반니 수사는 토마토와 호박과 양파를 성 마르코 수도원에서 정성껏 길렀다.”(Antonio Tabucchi, I volatili del Beato Angelico, 1987/영어번역 The Flying Cratures of Fra Angelico, 1991)
성 마르코 수도원은 다름 아니라 프라 안젤리코가 당대 최고의 부와 명성, 권력을 지녔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 코지모 1세 후원으로 재건하고 그가 수많은 걸작들을 프레스코 벽화로 남겨놓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타부키가 잘 이해했듯 이러한 위대한 작품들을 프라 안젤리코는 소박한 일상과 평범하고 충실한 수도사의 본분 속에서 일궈놓았습니다. 수도원 형제들을 위한 애덕으로 그가 수도사의 작은 개인방에 그려놓은 소박한 묵상을 위한 그림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흔히 프라 안젤리코는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초월의 문턱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화가로 칭송받습니다만,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초월의 문턱은 언제나 소박한 일상과 온유하며 순수한 마음 앞에 나타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