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을 대표하는 수석 주교좌성당인 톨레도 주교좌성당 내부.
세계교회의 거룩한 학문과 영성을 발전시킨 곳은 바로 수도회다. 16세기 스페인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한 데레사(Teresa) 성녀가 오늘날까지 교회사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비롯해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 스페인 영성가들이 탄생시킨 수도회들은 수많은 성인·성녀, 선교사, 학자를 배출했다. 가톨릭 교회의 ‘맏딸’ 역할을 했던 스페인 교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데레사 성녀의 일대기다. 스페인을 찾는 많은 이들이 순례를 통해 영적 깨달음을 얻는 길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값지다.
■ 고난의 땅이며, 기회의 땅 톨레도
스페인 톨레도(Toledo)는 스페인에서 ‘신앙의 수도’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관광 도시이자 데레사 성녀의 영성이 깃든 이 땅은 스페인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며 순례자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8세기부터 400년 가까이 이슬람인들이 점령했던 땅이라 독특한 이슬람 건축양식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도 접할 수 있다.
톨레도에 있는 성당에서는 주말이면 쉴 새 없이 결혼식이 열린다. 톨레도는 물론 주변 도시에서 몰려든 하객들로 성당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스페인 수십 개 교구를 대표하는 수석 주교좌성당은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알무데하 주교좌성당이 아닌, 스페인 최고의 건축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톨레도 주교좌성당이다. 그만큼 톨레도에 대한 스페인의 신앙적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톨레도 주교좌성당에서 언덕 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다 보면 데레사 성녀가 1569년 창립한 다섯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이 보인다. 1562년 톨레도에 도착한 성녀는 곧바로 수녀원 창립에 몰두했지만 주교좌성당 참사위원들이 극구 반대해 난항을 겪었다. 창립 초기에는 생활비가 모자라 수녀들이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나간 것이다.
톨레도는 데레사 성녀에게 고난의 땅이자 영성을 발전시키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숱한 난관 속에서 영혼 구혼의 길을 걸었던 성녀는 이 곳에서 위대한 작품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1575년 ‘맨발의 가르멜회’로 불리는 ‘원시 규율파’ 탁발수사들과 ‘신발을 신은 가르멜회’로 일컬어지는 ‘완화된 규율파’ 수사들이 관할권 분쟁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가르멜회 총장이 개혁사업을 포기하고 수도원 정주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데레사 성녀의 영적 아들과도 같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톨레도에 감금됐다. 고뇌가 가득했을 이 시기, 데레사 성녀는 기도와 관련한 대작 「영혼의 성」을 집필한다. 성녀는 이를 발판으로 교회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을 저술할 수 있었다.
■ 불모지에서 수녀원 설립 말라곤
스페인 라만차(La Mancha) 지방에 있는 외진 마을 말라곤(Malagon)은 데레사 성녀가 1568년 세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한 곳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작은 면 사무소 소재지 정도 규모인 말라곤은 허허벌판 같은 곳을 고속도로로 내달려야 겨우 찾을 수 있는 지역이다. 데레사 성녀 시절에는 이보다 더 했을 것이다. 수녀원 창립 당시 마을 사람들 모두 가난했기 때문에 수녀들의 생계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고 알려진다.
말라곤 맨발 가르멜 수녀원 앞 마당에는 데레사 성녀 동상이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동상은 수녀원을 바라보며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다. 수녀원이 건립될 당시 데레사 성녀는 건설 현장을 수시로 직접 방문해 진행 사항을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봤다고 한다. 불모의 땅에서 어렵고 힘들게 창립하는 수녀원이기에 성녀의 애착심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말라곤 맨발 가르멜 수녀원은 데레사 성녀의 창립 순서로 볼 때 상당히 일찍 설립된 것이다. 또 말라곤 수녀원 창립 멤버였던 수녀들은 다른 수녀원 창립을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고 전해져 그만큼 데레사 성녀가 아꼈던 수녀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데레사 성녀가 스페인 곳곳에 수녀원을 창립하며 내세운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저한 복음적 청빈을 사는 공동체’라는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은인들로부터 연금을 받아 수녀원을 창립하는 경우도 생겨났지만 물질적 가난을 통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수녀원 앞에서 미소 짓는 데레사 성녀 동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된다. 불모지에서 ‘성령의 마을’을 탄생시켰던 500년 전 영성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 스페인 여행의 꽃 순례길
데레사 성녀의 발자취를 찾는 이번 취재는 스페인 관광청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스페인은 유럽 교회를 대표하는 나라로 유구한 문화유산을 간직해 우리나라 성지순례객과 일반 관광객의 발길이 몰린다. 스페인 관광청에 따르면 스페인을 찾는 한국인은 지난 2014년 16만여 명에서 지난해 31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스페인의 많은 관광자원 중에서도 ‘순례길’은 스페인 여행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유명한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을 비롯한 순례 코스들이 한국에 알려져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관광청 이은진 부장은 “종교를 초월해 스페인 순례길을 찾는 한국인이 매년 크게 늘고 있다”며 “스페인 순례길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외국인 관광객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찾는 순례객들은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성 야고보가 서유럽에서 전도하고 최초로 순교해 유해가 이송된 전승을 간직한 길을 걷는다.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 표기에서 도시 이름이 유래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la)가 최종 목적지다. 스페인과 프랑스 경계지역에서 출발하는 약 800㎞ 구간 등 7개 코스로 이뤄진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순례길인 ‘이냐시오의 길’(Camino de Ignatius)은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로 정평이 났다. 16세기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의 고향인 바스크 지방 로욜라(Loyola)에서 카탈루냐 지방 만레사(Manresa)까지 이어진 코스로 약 650㎞이다. 30대 초반의 로욜라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단하고 걸어갔던 바로 그 길이다.
이은진 부장은 “스페인 순례길은 이제 유럽을 넘어 전 세계 가톨릭 신앙인들의 도보 여행지로 자리매김했다”며 “신앙적 성찰을 통해 영성과 내면을 고양하는데 가치를 두는 한국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라곤 맨발 가르멜 수녀원 앞에 세워진 데레사 성녀 동상.
데레사 성녀가 세 번째로 창립한 말라곤 맨발 가르멜 수녀원.
데레사 성녀가 다섯 번째로 창립한 톨레도 맨발 가르멜 수녀원 성당.
스페인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