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참으로 오랜 세월, 나는 많이도 빌며 살아왔다. 하늘에도 빌었다. 땅에도 빌었다. 달님에게도 빌었고 별님에게도 빌었다. 바윗돌에도 빌었고 대감님에게도 빌었다. 빌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살 때였을까? 어려서 비는 것을 본 맨 처음은 어머님이 대감님께 비는 것을 본 것이었으리라.”
동화작가 마해송(馬海松, 본명 馬湘圭, 프란치스코, 1905~1966)은 어릴 때부터 지녀온 종교심에 대해 이같이 회상한다. 위의 인용구로 시작되는 자전적 수필집 「아름다운 새벽」(1961, 민중서관)은 이러한 종교심이 가톨릭 신앙이라는 종착지를 찾게 되는 과정을 그린 신앙고백서다.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에 오르며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74년 작가 사후에는 다른 수필, 추모글과 함께 묶여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마해송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화작가다. 유능한 잡지 편집자이자 수필가, 문장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학 세계의 중심이자 핵심은 동화다. 그는 1920년대 초 「바위나리와 아기별」, 「어머님의 선물」을 발표하면서 한국 아동문학을 선구적으로 개척했고, 일제시대에는 「토끼와 원숭이」, 「떡배 단배」 등 고통받는 민족 현실을 풍자하는 동화를 창작했다. 해방 후에는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고, 그 성과로 동화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주요 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1959년 「모래알 고금」으로 제6회 자유문학상을, 1964년 「떡배 단배」, 「비둘기가 돌아오면」으로 제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은 평단의 폭넓은 지지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그의 장편동화, 중단편동화, 동극, 노래가사, 수필 전부를 담은 「마해송 전집」(전 10권, 문학과 지성사)이 완간됐다.
아동문학연구자인 원종찬 인하대 한국학과 교수는 그의 동화에 영향을 미친 삶의 이력을 네 가지로 꼽는다. 개성 출신(1905), 색동회 가입(1924), 일본 잡지 ‘문예춘추’ 입사(1924), 종군문인 활동(1950)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어린 시절 민족 고유의 풍속과 문화를 넉넉히 향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민족에 대한 애정으로 나아갔다. 또 방정환 선생이 창립한 색동회 활동은 어린이 애호 사상을 형성시켰고, 그가 한평생 동화를 창작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한편 1921년 일본 유학 이후 20여 년간 ‘문예춘추’의 편집자, ‘모던일본’의 사장으로 일본 유명 작가들과 교류하며 지낸 경험은 사회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종군문인 활동은 적극적인 반공주의 작품을 창작한 배경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958년 세례를 받고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면서 1950, 60년대 그의 후기 작품은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아름다운 새벽」에서 그는 집안일을 거들던 ‘대구 할머니’와 부인 박외선 여사(체칠리아, 전 이대 무용과 교수, 1915~2011)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힌다. ‘대구 할머니’가 작중인물로 등장하는 동화 「앙그리께」를 창작하면서 그는 부인을 통해 1·4 후퇴 당시 가톨릭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안면이 있던 사제를 떠올리는데 그가 바로 시인, 번역가, 영성가로 유명한 최민순 신부였다.
“생각난 신부가 있었다. 피난 대구에서 두 어 번 만난 적이 있던 신부였다. 그때만 해도 천주라든지 신부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심했지만, 몹시 수줍어하고 여자처럼 부드럽고 겸손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여러 나라말을 알고 학문이 깊고 덕이 높은 신부라고 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날그날을 당장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에 태도가 어쩌면 오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주춤해졌다… 그러나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신부라면 그즈음의 내 태도가 불손했다 하더라도 이해가 있을는지 모른다는 희망도 가져 보았다. 그 신부라면 자주 찾아가서, 나무 그늘 같은 데서 예사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교리를 엿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아름다운 새벽」 중에서)
최민순 신부에게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꾸준히 가톨릭 교리를 전해 듣고도 마해송은 신앙에 대해 여러 고민과 회의를 거치지만 결국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다. 수필집의 제목인 ‘아름다운 새벽’이란 1958년 10월 3일 새벽 6시 성가수녀원에서 최민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그 새벽을 말한다. 「아름다운 새벽」은 신앙을 갖기까지 오랜 여정의 끝, 즉 영세일 새벽에 대한 묘사로 마무리된다. 이후 마해송은 최민순 신부와 함께 전국가톨릭용어위원회에서 성경, 기도문의 용어를 검토, 통일, 심의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아들 마종기(라우렌시오) 시인은 가족 모두가 신부님께 여러 개인적인 일들을 상담하고 자문을 받는 등 절친했다고 전한다.
마해송은 상당 기간 고심하면서 늦은 나이에 입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교 후에는 혜화동성당에서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 최근 출간된 전집에 발굴, 수록된 수필 ‘또 일본에서 드린 미사’에는 40일간 아내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는 중 시골 마을에서도 늘 성당을 찾아 아침미사를 참례하는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영세 이후 줄곧 「가톨릭소년」에 작품을 발표했기에 그의 후기작 대부분은 「가톨릭소년」에 실려 있다. 단편동화 「생각하는 아버지」(1963.4.), 「경우 밝은 여우」(1963.6.), 「개한테 진 여우」(1963.7.), 「눈이 빠진 아이」(1963.8.), 「여우 없는 여우골」(1963.9.)을 발표했고, 중편동화 「그때까지는」(1963.11.~1964.5.)을 연재했다. 1966년 11월 6일 만 61세에 뇌일혈로 선종해, 「가톨릭소년」 1966년 12월호에 게재된 단편동화 「들국화 두 포기」가 유작이 됐다. 그 해 가톨릭신문은 국내 10대 뉴스로 “장면, 마해송씨 서거”를 선정할 정도로 그는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