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특한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화홍문(왼쪽)과 방화수류정.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라고도 불리는 수원 화성. 건축적으로 역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는 곳이지만, 신자들에게는 박해 중에도 신앙을 증거한 신앙선조들을 기리는 순교성지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화성을 순례했다.
화성을 순례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수원대리구 북수동성당이다. 현 성당 우측 순교자 현양비와 수녀원이 있는 자리에서부터 남쪽으로 큰 길가 종로까지는 옛 토포청이 있던 자리다. 토포청은 죄인을 심문하고 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물 적신 창호지를 얼굴에 발라 질식사 시키는 백지사형과 미루나무에 목을 걸어 처형한 교수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북수동성당 사무실(031-246-8844)에서 화성에 있는 순교자와 관계된 장소를 표시한 지도가 담긴 손수건을 구매할 수 있었다.
화성 내에는 순교지가 지천에 널려 있다. 북수동성당 맞은편에 있는 화성행궁은 양반 신자들을 심문하던 곳이고, 행궁 앞 종로사거리는 본보기로 신자들을 공개처형하던 자리다. 또 행궁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신자들을 처형하던 사형터가 있다. 동북포루, 동남각루 등도 공개처형을 하던 장소다. 순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장소만 17군데나 됐다.
화성 내에서 순교한 순교자만 20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얼마나 그 모습이 참혹했는지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무당짓을 하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마라”는 말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사형터에서 처형된 시신을 내보냈다고 하는 화서문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걸었다. 장안문에 이르러 시내를 바라봤다. 박해 당시에는 장터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자들을 몽둥이로 매질해 죽이는 장살형이 이뤄지던 곳이다. 팔달문 밖 장터 역시 장살형이 이뤄졌다고 한다.
장안문을 지나 화성 북쪽의 수문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에 다다랐다. 화성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사실 순교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하지만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세례자요한)의 십자가 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화성의 많은 건축물들은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많은데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역시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건축기법면에서도 새롭지만, 무엇보다 건축물 곳곳에 십자가 형상을 담은 것이 이색적이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대들보는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됐다. 뿐만 아니라 방화수류정의 서쪽벽면에 수많은 십자형상을 담아 석양이 질 때면 서쪽벽면의 십자가가 빛을 반사해 아름답다고 평이 나있다. 마찬가지로 북수동성당 인근의 종로사거리도 기존의 T형태가 아니라 십자형태를 이루고 있다.
정약용은 평소에도 십자가형의 도장을 지니고 다녔고, 관에서도 여러 십자가가 발견됐다고 한다. 비록 외면적으로는 배교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지 않았던 정약용의 면모를 그의 건축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방화수류정에서 다시 북수동성당까지 수원천을 따라 방화수류길을 걸었다. 천이 흐르고 버드나무가 늘어진 이 운치 있는 길 역시 순교자들이 지나간 길이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문과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되던 길이었다. 마냥 평온해 보이는 이 길을 지나간 순교자들의 마음속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하지만 그 수많은 순교자 중에 이름이 기억되는 것은 80여 명에 불과하다. 성당에서 순교자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진 못해도, 하느님을 향했던 그 뜨거운 마음은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 수많은 십자형상이 눈에 띈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대들보에 새겨진 십자가 모양.
북수동성당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