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운 신부의 영성과 삶의 지혜
브라운 신부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영성과 삶의 지혜는 올바르고 확고한 신앙, 이성에 대한 합당한 신뢰와 건전한 상식,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신비화와 현혹됨하고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신비에 대한 참된 경외심 등이라 하겠습니다. 브라운 신부가 여러 복잡해 보이는 사건들과 만났을 때, 사태의 진실에 육박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 건전한 이성과 상식, 깊고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한 판단력은 영성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브라운 신부 이야기에서는 여러 번 밀교 전도사나 마술사, 술수를 부리는 이들과의 대결이 나오는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독자들은 현혹하려는 힘에 대항하는 판단력과 ‘건전한 상식’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됩니다.
‘보라색 가발의 비밀’이라는 이야기에서 브라운 신부는 진실을 보지 않고 외면하게 만들며, 현혹시키고, 그렇게 현혹된 채로 남아있도록 이끄는 이야말로 악마적이라 지적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진실을 직시하는 빛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비밀은 사악한 것입니다. 사탄이 당신에게 무언가가 너무 무서운 것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든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너무 끔찍하니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진실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견뎌내야 합니다. 간청하니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악몽과도 같은 저주의 비밀을 털어놓아 주십시오.”
브라운 신부는 물론 우리가 건전한 상식과 이성의 빛에 의한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자주 ‘맹점’이 있기에 핵심적 사실을 눈앞에 두고서도 보지를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를 우리는 에드가 알란 포의 단편 추리소설들을 연상시키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네들이 이걸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만 모든 일은 추상적인 곳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지. 더군다나 이 사건은. 사람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 사람들은 질문한 사람이 의미하는 것 혹은 그들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한다네. 어떤 부인이 시골 저택의 부인에게 ‘댁에 함께 지내는 분이 계시나요?’라고 물어본다고 가정해보세. 이 질문을 받은 부인이 ‘네, 하인 한 명, 마부 세 명, 그리고 하녀 한 명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걸세. 비록 하녀가 방 안에 있고 하인이 그녀의 바로 뒤에 있다 해도 말이야. 그 부인은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함께 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도 없다’가 바로 이 사건에서의 ‘아무도 없다’일세. 그러나, 한 의사가 전염병에 대하여 조사를 하면서 ‘댁에 함께 지내는 분이 계시나요?’라고 묻는다고 가정해보세. 이 부인은 하인과 하녀, 그밖에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낼 걸세. 이것이 언어가 쓰이는 방식일세. 진실한 대답을 들었다 해도, 문자 그대로 보면 질문에 맞는 대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거지.”
브라운 신부에게서 우리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인식에 있어서의 맹점을 알아채고 경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찰이 필요하리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브라운 신부가 말하는 성찰과 이성적 숙고, 건전한 판단력은 물론 굳건한 신앙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신비를 알아보는 영적인 감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비를 일시적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눈속임으로 격하시키는 ‘신비화’로 유혹하는 내적 경향이나 외적 영향을 극복하게 하는 정신의 덕이라 할 수 있겠고, 그런 의미에서 참된 신비를 향한 올바르고 합당한 경외심의 긴요한 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깨어있는 이성적 판단력은 우리가 깊은 신비를 감지하는 지각력을 지니기 위한 도야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또한 브라운 신부를 통해 신비란 눈속임이나 억지로 신비롭고 대단하게 보이게 하려는 일체의 시도에서 자유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마법적인 것과 주술적인 것을 신비인 것처럼 포장하는 세상의 수많은 시도들을 대할 때, 그 외면의 놀라움이나 신기함, 그리고 현란함에 눈멀지 말고, 그 외피를 치워버리고 그 본질을 직관한다면,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빈약하고 초라하며 유치한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우리가 영성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깊이 새겨볼 만한 관점이라 하겠는데요. 특히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브라운 신부가 악의 없이 재빨리 말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많이 있지요. 파리의 카페나 술집에서 이시스 강의 베일을 벗겨냈다거나 스톤헨지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건에도 그들은 몇 가지 신비주의적인 설명을 들이대지요.”
변호사인 버나드 블레이크는 부드럽고 검은 머리를 정중하게 말하는 사람 쪽으로 기울였지만 소리 없는 그의 웃음은 좀 냉담했다.
“신부님이 그런 신비주의적인 설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적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브라운 신부가 온화하게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오히려, 그 부분이 제가 그들에 대격하는 이유지요. 가짜 변호사가 나에게 겁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겁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야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옷을 입은 바보를 히아와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크레이크씨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사기꾼이 저에겐 비행기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꾸며댈 수 있지만, 웨인씨에겐 그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진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지요. 모든 걸 백일하에 드러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밀교 전도사는 무언가를 어둠 속에 비밀로 숨깁니다. 하지만 그 비밀만 알아내면 아주 평범한 것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