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35)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6·끝)
골짜기서는 거대함을 보지만 정상에서는 작은 것 볼 뿐
신앙인은 세상 속에서 영원의 길을 찾는 순례자
신앙과 이성의 조화 추구하는 ‘삶의 철학자’ 돼야
영국 BBC 드라마 ‘파더 브라운’ DVD 표지의 일부.
■ 브라운 신부의 인간탐구와 자기성찰의 삶
체스터튼이 창조한 매력적인 인물이자,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올바른 영적 태도를 곰곰이 새겨보게 하는 브라운 신부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알아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 회가 되었습니다. 지난 회에는 특히 브라운 신부가 보여주는 판단력과 지혜가 신앙과 이성의 조화, 건전한 상식에 대한 적절한 신뢰, 신비에 대한 참된 경외심과 허황된 환영을 거슬러, 실재의 질서를 보려하는 지적인 성실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를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존재’와 ‘인식’의 차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거슬러 갈 수 있는 ‘존재론’과 ‘인식론’적 명료함이 브라운 신부에게는 몸에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것이 살아있는 철학, 진정한 지혜의 추구로서의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윤리적 삶과 영성적 깨달음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것이 가톨릭 철학과 신학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물론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것이 굳이 어려운 철학적 용어나 사변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지혜를, 실제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살아가는 실천의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이니까요. 실천의 영역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과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과, 더 나아가서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신비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가지고자 부단히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실재와의 만남’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영원을 향하는 길을 찾는 순례자이자 구도자로서 매 순간, 삶의 계기마다 투명하고 가림 없이 보기를, 그리고 허상이 아니라 참된 실재와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신앙인은 존재를 인식하는 눈을 가다듬어가면서 비로소, 참된 윤리적 행위와 영성적 삶이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이들이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삶의 철학자’가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브라운 신부는 겉으로 보기에 우아하고 존경받고 확신을 지니며 흔들림 없어 보이는 자신감에 차 있는 이들이 얼마나 내적으로 깊은 오류에 빠져있고, 존재론적인 도착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지를 볼 줄 아는 이입니다. 그의 인간 탐구는 잘못된 존재론과 인식론이 어떻게 그릇된 윤리적 죄와 잘못된 영성으로 귀결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주 그러한 오류는 언뜻 보기에 선과 덕처럼 보이는 윤리적, 영성적 오만함에서 오기도 합니다. 브라운 신부 이야기 중에서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단편인 ‘신의 철퇴’에 나오는 한 종교인은 방탕아이자 무뢰한인 자신의 형을 스스로 단죄합니다. 브라운 신부는 그가 어떻게 ‘정의’라는 선에 대한 열정이 이러한 비극으로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고 있던 한 사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단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높고 고독한 장소를 더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루나 뾰족탑에 있는 구석이나 틈새 같은 곳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 현기증 나는 장소에 오르게 되면 온 세상이 수레바퀴처럼 자기 발 밑에서 돌아가고 있으니, 머리도 같이 돌아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양 환상에 빠지곤 했죠. 그래서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음에도, 아주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브라운 신부는 자기 자신을 진솔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아래로 내려보는 오만이 이른바 지도층의 고질적인 ‘인식의 병’임을 ‘통로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이야기에서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명인사들이 묘사한 범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사실은 통로 끝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요점인데요, 여기서 브라운 신부는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우스꽝스러운 뿔이 달린 땅딸보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범인의 인상착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우리가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명망 높으신 저 두 분들께서는 그러지 못하셨는데, 귀하는 어떻게 그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브라운 신부는 전보다 더 힘들게 눈을 깜박거리며 더듬더듬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거울을 자주 보지 않아서겠지요.”
브라운 신부는 존재론과 인식론적 오류, 윤리적 타락, 영성적 빈곤을 야기하는 매우 위험한 악덕으로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는 태도, 곧 현대인에게 두드러진 ‘자아도취’를 지적합니다. ‘배우와 알리바이’라는 단편에서 사람들이 성녀처럼 떠받드는 맨더빌 부인의 숨겨진 품성을 통찰하는 장면은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창문을 내다보기 전에 거울을 먼저 들여다보는 유형의 사람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 인생에 최악의 재앙입니다. 그 벽 거울은 그녀에게 불운한 것이었습니다.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브라운 신부 이야기 중에서도 후기작인 ‘브라운 신부의 부활’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레이스라는 인물은 어떤 허상이나, 자기 자신을 떠받드는 언론에도 들뜨지 않는 브라운 신부의 진정한 품성에 다음과 같이 감탄합니다.
“저는 그렇게 깨어난 사람 중에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잠꼬대를 할 때도, 온건한 정신과 소박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갖춘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이에 브라운 신부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겸손함은 거인의 어머니입니다.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대한 것을 봅니다. 하지만,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작은 것들을 볼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역설의 대가’ 체스터튼은 이처럼 친근하면서도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 인간형을 브라운 신부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