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평화나눔포럼 결산] 중동·동유럽 주교들, 어떤 메시지 남겼나
‘용서’만이 평화의 길
처참한 전쟁 상황에서 화해 추구한 영성 공유
“분단 문제 해결하려면 남북한 공동 노력 필요”
아직도 참혹한 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8월 17~23일 일주일간 한국을 찾아 ‘2016 한반도평화나눔포럼’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떠났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과 한국교회에는 그들이 던져준 강력한 호소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
벱싸라 부트로스 라이 추기경(중동 및 안티오키아 마로나이트 교회 수장, 총대주교)과 빙코 풀리치 추기경(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대교구장), 스타니슬라브 호체바르 대주교(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교구장), 프란요 코마리챠 주교(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반야루카교구장) 등은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과 동유럽 발칸 지역에서 종교와 민족이 뒤엉킨 분쟁과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8월 22일 오후 서울 명동주교좌성당 파밀리아채플에서 ‘함께 평화를 꿈꾸다’라는 제목의 특별대담에 참석했다. 분쟁을 체험한 교회 지도자로서 평화와 화해를 가져올 수 있는 해법을 깊은 영성의 차원에서 한국교회 신자들과 나누는 자리였다. 때로는 눈물겨운 체험담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라이 추기경, 호체바르 대주교, 코마리챠 주교가 참여한 이 특별대담은 2016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결산하면서 대립과 갈등이 멈추지 않는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한국교회가 수행할 과제를 찾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대담자들이 내세운 핵심 가치는 ‘용서’였다.
중동과 동유럽 발칸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8월 21일 서울 절두산순교성지 성당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 총 들이댄 군인 강복한 코마리챠 주교
특히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는 코마리챠 주교는 이번 한국 방문 기간 중 과묵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용서란 무엇인지를 몸소 겪은 체험으로 웅변했다. 코마리챠 주교가 ‘십자가의 길 그리고 평화’를 주제로 들려준 대담은 한국 신자들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라 할 만했다.
그는 “한국과 반야루카교구는 먼 거리를 뛰어넘어 가까운 사이가 됐다”며 “유럽교회는 반야루카교구가 겪은 고통에 대해 물은 적이 없지만 한국교회는 우리 교구의 고통에 관심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반야루카교구는 1992년 시작돼 1995년 종결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으로 한 때 25만 명에 달하던 교구 신자수가 전쟁 후에는 5000여 명만 남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됐다. 세르비아계 비밀경찰이 설치한 폭약에 의해 교구 48개 성당 가운데 35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심각하게 훼손됐고 사제 7명이 암살당했다. 단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집에서 끌려나가 살해당한 평신도 수는 8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반야루카교구에는 학살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어 순교자적 정신이 없으면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기는 힘든 땅이 됐다.
코마리챠 주교는 “반야루카교구 신자들은 전쟁 기간 중 가톨릭 신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지만 하느님이 시킨 대로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었다”며 “한국 신자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제로 실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전쟁 중 어느 깊은 밤 100여 명의 신자들이 주교관을 둘러싸고 ‘주교님,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라고 절박하게 묻는 모습에 힘이 솟았다”면서 “주교관을 신자들에게 내줘 보건소와 식당으로 쓰게 하고 일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직장도 알선해 줬다”며 긴박했던 한 순간을 전했다. 코마리챠 주교가 신자들에게 내준 주교관에는 반야루카교구민들을 박해하던 세르비아 군인들도 찾아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다. 원수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복음을 나눈 것이다.
코마리챠 주교는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납치돼 총구 앞에 의연히 섰던 체험도 들려줬다. “10여 명의 군인들에게 납치됐을 때, ‘내가 생명을 잃는다 해도 기꺼이 죽겠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판단하실 것’이라 말하고 제 앞에 서 있던 군인들을 먼저 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코마리챠 주교를 쳐다만 보다가 총을 쏘지 않고 물러갔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일주일 동안 한국교회 순교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힘이라는 믿음으로 한국교회 신자들이 평화의 십자가를 지고 가자”고 호소했다. 또한 “박해 속에서도 순교자적 삶을 살고 있을 북한교회 신자들과 반야루카교구가 영적 자매결연을 맺고 북녘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도 밝혔다.
■ 남북한 공동 노력 강조한 라이 추기경
코마리챠 주교보다 먼저 무대에 오른 라이 추기경은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목으로 대담자로 나서 “레바논 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 신자들 사이의 분열로 1975~1989년 내전을 겪었지만 평화협정을 맺은 후에는 마치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용서했다”고 말했다. 이어 “남한은 북한과 비교하면 큰 성장을 이뤘고 남북한이 화합해야만 분단선이 무너질 것”이라며 “저를 포함해 한국을 방문한 주교단이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대변하는 친구가 돼 주겠다”고 우의를 드러냈다.
라이 추기경은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우구스티노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어린 기도에 회심하고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신학자가 됐던 것처럼 한국 신자들의 기도가 북한을 변화시키고 남북을 하나로 만들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대담을 마무리했다.
■ 호체바르 대주교 “원수 위해 기도하라”
호체바르 대주교는 ‘자비의 길, 평화의 길’을 대담 주제로 택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벌어졌던 비극의 역사를 반추하며 한반도 평화의 길을 제시했다.
베오그라드는 1990년대 말까지 정교회와 무슬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집단 학살이 자행되는 피의 역사가 반복됐던 곳이다. 종교 분쟁의 피해자가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한, 두 얼굴을 지닌 종교인들이 뒤섞여 사는 곳이 바로 베오그라드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베오그라드 정세는 이전에 비해 안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가톨릭에 대한 타 종교의 악의적 선전선동은 그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호체바르 대주교는 “파괴와 살상 앞에서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 때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를 어떻게 이웃과 나누고 삶을 회복시켜야 하나 고뇌의 시간을 보낸 적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그리스도를 체화하고 증거하는 것만이 평화가 처참하게 파괴된 상황에서 평화의 불씨를 살리는 길이었다”며 “한국에 오기 전 한반도 분단상황을 전해 듣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줄곧 기도해 왔다”고 밝혔다.
호체바르 대주교는 가난하던 어린 시절, 6km를 걸어 성당에 가곤 했던 주일이 너무나 아름다운 날이었다고 추억한 뒤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이들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이어 “예수님이 수난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복음 말씀으로부터 교회는 항상 세상 일에 민감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잠에 빠져 이웃의 문제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을 되새겼다”고 강조했다.
또한 “발칸 지역 주민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평화를 구축하기는 어렵다는 좌절에 빠져 있었지만 저는 ‘발칸인에게 평화를’이라는 평화운동을 신앙인과 정치인을 가리지 않고 전개했다”며 “제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산당원에게 피살됐지만 어머니는 항상 화해를 강조하면서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호체바르 대주교는 “나에게 모욕과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묶여 있으면 나는 앙심을 품은 노예가 되는 것”이라면서 “가톨릭신자는 상대의 죄는 똑바로 보되 그에게 미움의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되고 그런 면에서 가톨릭 교육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르비아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향하는 미사를 봉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는 호체바르 대주교는 “한반도의 문제는 종교인 모두의 관심사지만 특히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평화 실현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톨릭신자들은 공동선 실현을 위해서는 정치계에서도 일해야 하고 권력욕이나 돈에 욕심이 있는 정치인이 아닌 자신을 희생하며 섬김의 정치를 하려는 이들에게 투표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