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강정평화 컨퍼런스 ‘비폭력 평화와 교회’ 소모임이 9월 3일 제주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 관점에서 보는 현장사례’를 주제로 워크숍을 갖고 있다.
“생명평화로 고치가게마씸(함께 갑시다)!” 순박한 주민들이 어울려 살던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언제나 넉넉한 삶의 버팀목이 돼주던 넓고 푸른 바다는 ‘개발’과 ‘안보’라는 미명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마을에는 웃음소리 대신 갈등과 원망, 분노와 패배감, 아픈 상처들이 자리 잡았다. 바로 그 땅에서 생명과 평화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비폭력으로, 복음 실천을 통해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9월 2일부터 사흘간 강정마을 일대에서 열린 ‘2016 강정평화 컨퍼런스’는 평화의 참 의미를 되새겨보는 자리였다. 참가자 200여 명은 제주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제주교구, 예수회 한국관구,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 주최로 열린 행사 현장을 찾았다.
2016 강정평화 컨퍼런스 개막식을 앞둔 9월 2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인근 ‘제주 해군기지’ 앞 도로. 시민사회단체 소속 20여 명이 율동을 하며 제주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행사를 열고 있었다. 제주 해군기지는 극심한 환경 파괴와 군사주의 논란을 빚고도 지난 2월 준공됐다.
이들이 행사를 마치려고 할 즈음, ‘폭발물’이라는 표식을 붙이고 화물을 가득 실은 트럭 1대가 제주 해군기지 입구를 출발해 서귀포시 쪽으로 향하는 도로로 들어서려 시도했다. 이들은 트럭 앞을 막아서고 “폭발물 운반은 규정에 따라 호위 차량이 있어야 하는데 왜 단독으로 출발하는 것이냐”며 항의했다. 군 관계자가 사과를 하고 트럭을 해군기지로 되돌리면서 상황이 마무리됐다. 제주 해군기지가 들어선 강정마을의 아픔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날 오후 2시 개막식을 시작으로 열린 2016 강정평화 컨퍼런스는 ▲마을 만들기 ▲비폭력 평화와 교회 ▲아시아 평화교육 워크숍 등 3개 소모임 별로 진행됐다.
오후 3시30분부터 강정마을 회관에서 열린 ‘마을 만들기’ 소모임은 ‘강정마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주제로 했다. 발표에 나선 강정마을 토박이 주민 김성규(51)씨가 먼저 속내를 털어놨다. “사람들은 발전을 내세우지만, 과연 발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김씨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왜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강정마을 해녀 한경숙(84)씨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해군기지 근처에서는 해녀일도 할 수 없어요. 항상 찰랑찰랑한 맑은 물이 흐르던 우리 마을이 해군기지 때문에 완전히 망가졌어요. 강정마을이 이제 사라지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억울합니다.”
해군기지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정부가 부랴부랴 내놓은 ‘지역발전계획’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강정마을 고권일 부회장은 “해양레저공원, 프리미엄 아울렛 등을 세운다고 하는데 결국 대기업과 대자본 배만 불려주게 될 것”이라며 “범섬 해양공원 등 나머지 사업들도 강정마을이나 지역주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9월 3일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열린 ‘비폭력 평화와 교회’ 소모임에서는 비폭력과 복음을 주제로 패널 토의가 이어졌다. 한상봉(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는 “강정해군기지와 사드 배치 등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강대국들의 패권주의 싸움에 휘말릴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초기교회 그리스도인 모두가 명확한 평화주의자였다면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당한 전쟁론’이 주장된 이후 십자군 전쟁과 나치주의, 공산주의 혐오와 적대감 등 또 다른 악을 낳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로마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정당한 평화론’이 대두됐으며 이러한 복음적 비폭력 저항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예언자적 목소리”라고 설명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인 문하옥(74·골룸바)씨는 “어릴 때 친척들이 모두 사건에 연루돼 11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아직도 그 아픔을 치유하고 있는데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논란을 빚는 것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함패트릭 신부(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정당한 전쟁론은 비폭력을 행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저해시켰다”며 “가톨릭 교회는 물론이고 다른 신앙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비폭력에 관한 전 지구적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미츠노부 이치로 신부(일본 예수회 사회사도직위원장)는 일본 아베 정권이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일본을 몰아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교회는 정당한 전쟁론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베 정권으로 인해 매우 당황스러운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교회는 평화를 위해 작지만 큰 목소리를 계속 내려고 하고 있으며 강정마을 사태와 같은 국제적 문제에 대해 함께 연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9월 4일 컨퍼런스 참석자들은 행사를 마무리하며 각 소모임 별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우리는 폭력에 참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며 “회심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길을 향해 희망을 갖고 함께 걸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해군기지 문제로 흩어진 강정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새롭게 모아야 한다”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소외된 사람 없이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조발표 맡은 크리스 라이스 박사
“한반도 평화 실현 위한 길에 모든 그리스도인 나서 주길”
“불가능할 것 같았던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결국 일어났습니다. 인종갈등 문제가 풀리지 않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무혈혁명으로 흑인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모두 기적이죠. 강정마을과 한반도 평화를 향한 길에도 반드시 기적은 찾아올 것입니다.”
9월 2~4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개최된 ‘2016 강정평화 컨퍼런스’에서 기조발표를 맡은 크리스 라이스(Chris Rice) 박사. 9월 3일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강정마을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실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이스 박사는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봉사한 부모님을 따라 청소년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미국 듀크대 신학부 화해 센터 창립 소장이었으며 현재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CC) 동북아시아 책임자를 맡고 있다. 인종갈등 해결을 위한 시민 운동에도 오랜 기간 참여해왔다.
지난해 강정마을을 방문해 ‘제주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는 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라이스 박사는 “해방 이후 벌어졌던 ‘제주 4·3 사건’의 고통이 아직도 지속되고, 이제는 해군기지 문제로 시련을 겪고 있는 제주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진정한 신앙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가 겪고 있는 아픔은 한반도 분단 현실에서 비롯된다. 라이스 박사는 세계 유일 분단국가인 한국이 통일을 이루기 위한 선제 조건으로 ‘평화를 위한 희생’을 강조했다. 그 희생에는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그가 바라보는 한반도 분단 현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통일의 길로 나가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통일’이라는 단어 역시 정치적으로 채색된 것이기 때문에 연합과 화해를 뜻하는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50년 넘게 분단이라는 벽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 믿기 힘듭니다. 분단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북한을 ‘다른 나라’ 혹은 ‘원수의 나라’로 보고 있죠. 통일에 대한 기본 인식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이어 라이스 박사는 평화를 향한 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했다. “우리의 국적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현재 강정마을 사태는 우리에게 이 같은 근본적인 정체성을 묻고 있는 것이죠. 모두 그 아픔에 귀 기울이는 순례자가 돼 주십시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