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성모성년을 맞아 서울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렸던 한국 천주교 ‘성미술 전람회’가 62년 만에 재현됐다.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위원장 장봉훈 주교)는 지난 9월 21~27일 서울 명동 갤러리 1898에서 당시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됐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성미술을 새롭게 살펴보는 ‘한국 가톨릭 성미술 재조명전’을 마련했다.(관련기사 21면)
전시에서는 김세중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장우성 ‘성모 포영상’ 남용우 ‘성모칠고’ 김병기 ‘십자가의 그리스도’ 김정환 ‘성모영보’ 등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들을 비롯해서 장발 이순석 이희태씨 등 전시 참여 작가들의 관련 작품과 자료들이 소개됐다.
장발 선생을 중심으로 당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24명의 작가가 참여했던 ‘성미술 전람회’는 한국교회 미술 발전을 위해 여러 분야 작가들이 함께 준비한 최초의 본격적인 가톨릭 성미술 전시회로서 의미가 컸다. 아울러 현 가톨릭미술가협회의 전신인 서울미술가회를 발족시키는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이 전시는 당대 가톨릭 미술계의 특징을 반영함과 동시에 향후 한국 가톨릭 미술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전람회로서도 중요성이 크다. 특히 동시대 유럽 교회미술 쇄신 운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추상적 경향의 작품들과 한국화 된 성화의 과감한 수용 등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 앞서 반영된 진보적인 면모로 평가될 만하다. 지면을 통해 전시 작품들을 일부 소개한다.
■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김세중, 1954, 103.4×180×31.7(D)㎝,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해방 이후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조각가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1986)씨가 기해박해 때 순교한 동정자매(童貞姉妹)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녜스를 주제로 한 청동 작품이다.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작가의 해석에 따라 완성된 모습이 두드러진다. 그는 종교적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가능한 세부 묘사를 피했다. 인물의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얼굴은 각각 옆쪽을 향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최소한의 상징만으로 종교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교 미술 역사가 짧은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
■ 성모 포영상
장우성, 1954, 140×210㎝, 종이에 먹, 서울대교구청 주교관
새로운 한국화의 지평을 열었던 장우성(요셉, 1912~2005) 화백 작품. 그리스도교 회화의 전형적인 주제인 ‘성모자’ 상을 한국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단색조 한복을 입은 성모와 그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자세와 표정이 의젓해 보이면서도 다정하고 인간적인 느낌이다. ‘성미술 전람회’에는 이 작품 외에도 한국화 작품이 9점 출품됐는데 이들이 보여준 한복 차림의 예수와 성모, 성인의 표현은 한국적 표현으로 완성된 성화의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 성모칠고
남용우, 1954, 159.4×185.6㎝, 종이에 템페라,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전례박물관
여성 작가로 성미술 전람회에 참여했던 남용우(마리아, 1931~) 작가는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로 인해 겪게 되는 일곱 가지 고통을 한 화면에 담았다. 화면 정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배치하고 십자가 하단부에는 예수의 주검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모습을 그려 넣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4개 횡축과 대각선 방향을 이루는 2개 종축으로 나눠져 있으며 불분명하게 분할된 화면에는 피난 가는 성가족, 피에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등이 묘사돼 있다.
■ 십자가의 그리스도
장발, 1941, 60×45㎝, 캔버스에 유채, 서울 수유동 가르멜수도원
우리나라의 ‘교회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의 다양한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십자가 형벌의 상징이 되는 두 손과 발의 못 자국, 옆구리 창 자국을 그리게 되는 것과 달리, 예수의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중앙부는 확대하고 팔과 가슴 이하는 잘려나간 사진적 구도가 눈에 띈다.
‘유다인의 왕’(INRI) 푯말도 생략돼 있고 창 자국과 채찍 자국만이 선명하다. 후광은 가시면류관을 쓴 머리에서 빛처럼 뻗어가고 있다. 이러한 과감하고 파격적인 생략은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 노기남 대주교
박득순, 1965, 128×140㎝, 캔버스에 유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1902~1984)는 1942년 한국인 최초로 주교 서품됐고 1962년 대주교로 임명됐다. 전시회에 소개된 이 작품은 1965년 박득순(요셉, 1910~1990) 화백이 성미술 전람회 출품 이후 새롭게 그린 노 대주교의 초상화다. 서양 미술에 등장하는 교황의 초상화와 유사한 인물 자세 및 화면 구성을 드러낸다. 성경을 손에 들고 앉은 노 대주교 뒤편에 십자고상이 보인다.
■ 십자가의 그리스도
김병기, 1954, 92×122㎝, 캔버스에 유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전례박물관
이 작품은 김병기(루도비코, 1916~ ) 화백이 ‘성미술 전람회’를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 날카로운 선들이 오가는 화면을 통해 십자가의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죽음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화면 오른쪽 붉은 태양은 석양을 의미한다. 작가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표출된 역삼각형 구도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상징한다고 밝혔으며 훗날 자신의 작품에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작자 미상으로 분류됐으나 작가 서명과 「경향잡지」 출품작 목록 등을 통해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이자 김병기 화백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확인됐다.
■ 성모영보
김정환, 1954, 73.3×116㎝, 종이에 채색,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전례박물관
스테인드글라스 창 색유리들을 겹쳐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한국의 모시 조각보를 이어놓은 듯 파스텔 느낌의 면이 겹쳐있는 배경에 간결한 선묘로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을 드러냈다. 기존의 성모영보를 주제로 한 작품들 구도와 달리 김정환(1912~1973) 화백은 가브리엘 천사가 뒷모습을 보인 가운데 성모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세겹으로 표현된 날개는 성모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움직임을 암시하면서 화면에 리듬감을 주고 있다. 원근감이 생략된 평면적인 배경, 작가의 직관에 따른 색면의 배치, 이목구비가 과감히 생략된 인물의 표현 등은 추상적이고 현대화된 성화의 면모를 제시한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