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원자력평화이용국제회의에 참가한 닥 함마슐트(왼쪽에서 두번째). 출처 위키미디어
현재
단지 미래를 위한 다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내용으로서 지금은 의미가 충만하다.
그 내용이란, 지금에 우리의 내용이며, 이로써 우리의 비어있는 곳을 채운다 – 만일 우리가 단지 지금을 받아 안는 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침묵
침묵을 통하여 이해하라.
침묵으로부터 행하라.
침묵 안에서 이루어라.
내면
가장 긴 여행은 자신의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일상
매일의 날들은 언제나 첫 번째 날이다. 매일의 날들은 생명이다.
매일 아침, 삶의 그릇이 받들어져야 한다. 삶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다시 봉헌하도록, 매일 새롭게 비워둘 일이다 – 왜냐하면 전에 있었던 것은, 이제 빈 그릇의 투명한 형태 속에서 거울처럼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957년)
- 닥 함마슐트의 유고집 「길잡이」에서
■ ‘공적인 삶’의 의미와 닥 함마슐트의 생애
최근 몇 달간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들을 비통한 마음으로 되짚어보면서 ‘공적인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독일 출신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서 중 한 권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현대 정신적 위기의 중요한 뿌리를 각 개인들이 파편화된 사사로운 삶에만 몰입하고 공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마땅히 ‘공적인 삶’의 ‘빛’에 자기자신을 개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죠. 2차 세계대전 때 일찍이 나치 정권의 선동정책을 꿰뚫어보고 망명 길에 올랐던, 역시 유다인이었던 독일의 시인 힐데 도민(Hilde Domin)은 “왜 문화와 교양이 높았던 독일 사회가 그러한 지독한 독재의 광기에 굴복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었기에 그런 비극이 도래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적인 삶’의 ‘빛’이 인간다운 삶의 실현에 반드시 요구된다는 주장과 상통한다고 보여집니다.
한나 아렌트가 먼저 영어로 저술한 「인간의 조건」의 독일어 번역은 그 제목을 ‘비타 악티바 - 활동적 삶’이라고 달았는데요, 이는 여러모로 이 책의 주제와 더 잘 부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활동적 삶, 정치적 삶, 공적인 삶, 이처럼 다양하게 새겨볼 수 있는 이 라틴어 어구는 각 개인이 생존과 사적인 안위와 이익에만 매몰된 삶에서부터 공적인 헌신의 가치와 이를 통한 자기실현으로 나아가야 하며 자율적이면서도 상호 협력하는 시민으로서의 품위있는 삶을 영위해가야 한다는 책의 주제를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를 1960년대 말,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또한 전후 복잡하게 전개된 국제정세와 그가 새로운 활동 무대로 선택한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보며 저술했지만,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지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더 절실한 경고로 들립니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관료주의와 사적 이익추구의 포로가 되고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정보를 제한하며 왜곡해 국민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고유한 권리를 교묘하게 박탈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민화하려는 정치적 위기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이나 무력감의 한탄, 아니면 무관심이나 교묘한 여론 호도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치유를 위한 길을 찾는 것이 절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곱씹어 보며 이러한 혼돈과 위기를 넘어서는 길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자가 자유롭고 책임 있는 주체로서 ‘공적인 삶’을 형성하고 실현해가야 할, 양도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인격적 자존감을 되찾는 데서 시작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정치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새롭게 갱신된 시민정신이 살아날 때만이 민주주의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공적인 삶’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복원이 소소하면서도 획일화시킬 수 없는 개인으로서 누리는 일상과 내면의 자유와 개성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적인 삶’의 우위를 말하며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차원에 대한 깊은 존중과 경외를 잃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이라는 절대자와의 깊은 내면적 관계 속에서 각자가 본래적으로 지닌 사회적, 공적 책임의 진지함을 자각하고 사명으로 여기며, 공적인 삶과 영적 여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근원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고 깨달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 깨달음에 충실하고 실천하며 살아간 닥 함마슐트의 삶은 오늘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닥 함마슐트의 유고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그가 그 방대한 공적 직무를 수행하면서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이 맡은 공직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알게 됩니다. 사실 ‘공적인 삶’은 그에게는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처럼 주어진 사명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가문은 수백 년 전부터 꼽히는 스웨덴의 귀족가문이었고, 더구나 특권의식과 영지 속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대신 자신들이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다름 아니라 닥 함마슐트의 아버지인 할마 함마슐트(1862~1953)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스웨덴의 수상을 역임하기까지 했던 할마 함마슐트는 닥 함마슐트에게 사심 없이 공적인 직무를 사명으로 여기며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공적 유익을 위해 헌신하는 도덕성과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아버지의 모습은 때로는 아들에게 하나의 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닥 함마슐트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되,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겸허하고 외유내강의 덕목을 체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생동감 있는 삶을 사랑하고 자연과 예술, 언어적 아름다움의 감수성을 지녔고, 영적인 실재에 대한 진지하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그가 살아있는 내적 균형을 얻게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 아녜스에게서 수많은 학자, 예술가들을 배출하였던 외가 쪽 전통도 큰 역할을 하였겠지요. 그의 글을 읽으면 그의 격조 높은 문학적, 예술적 심미안과 섬세한 감수성을 실감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 비록 그가 경제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하여 외교관이자 국제 정치가로서의 길을 걸었지만, 평생 진지하게 문학을 자신의 동반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생 존 페르스(Saint–John Perse, 1887~1975)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의 대표작을 스웨덴어로 번역하였고, 마침내 1960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