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상)
우리말 ‘운율’과 ‘정서’ 감각적으로 표현한 1930년대 대표시인
일본유학 중 ‘프란치스코’로 세례 받아
‘카페 프란스’서 나라 잃은 설움 토로
귀국 뒤 월간 「가톨릭청년」에 참여
■ 어문 민족주의 토양에서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제 2연)
다섯 연에 걸치는 긴 시 ‘향수’를 정지용은 1923년 3월에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이때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어서 5월에 일본으로 가서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입학했다.
정지용 시인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 ‘향수’를 일본에 유학하기 직전에 써서 발표를 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그가 시인이 된 것은 일본 유학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정지용이 휘문고보에 재학할 때 조선어 교사로 가람 이병기가 있었다. 이병기는 갑오경장 이후 조선어의 근대적 학문체계를 개척하고 언문(言文)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한 주시경의 제자였다.
주시경이 중년의 나이에 신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병기는 휘문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발족시키고, 자신도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시조시인으로도 활동했다. 민족문학사 안에 있는 전통시로 시조를 쓰면서 이병기는 외래 자유시에 못지않은 민족 언어의 리듬과 신선한 감수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스승의 영향 아래서 정지용은 민족의 언어와 정서를 돈독하게 키워 나가는 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 농촌에서 태어나 17세에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입학금을 낼 형편이 못되었는데 신입생 88명 중 수석이었으므로 교비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입학 후 휘문고보 선배로 홍사용·박종화·김영랑, 후배로 이태준이 있었다. 이들이 뒷날에 모두 문단의 중진으로 진출하게 된다.
일본에 유학한 후 1926년 4월에 정지용은 기타하라 하쿠슈가 주재하는 잡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 시 ‘카페 프란스’를 투고해 발표가 된다. 기타하라 하쿠슈는 당시 일본 문단의 원로 시인이었는데, 신인 정지용의 시를 문단의 중진 시인들과 같은 자리에 싣는 대우를 했다.
이 데뷔작 ‘카페 프란스’에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라는 탄식이 들어 있다. 이어서 다음 행에서는 “대리석 테이블에 닷는 내 뺨이 슬프구나!”라고 했다.
충북 옥천 정지용 생가에 있는‘향수’시비. 출처 위키미디어
■ 1930년대 문단의 중심으로
정지용은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인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하라마치 교회에서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신자가 된다. 나라도 집도 없는 슬픈 처지에서 의지할 데를 찾았을 수 있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영문학 수업 중 전공은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였다. “잉글란드의 푸르고 즐거운 땅 위에 / 우리가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 / 나는 정신의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 이라고 블레이크는 시에서 말했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거부하고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블레이크의 사상이었다. 당시 도시샤대학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교수가 블레이크의 시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야나기 교수는 한국의 고대문화 특히 신라의 석굴암에 대해 최대의 예찬을 하며, 일본에는 그만한 수준의 문화재가 없다고 평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야나기 교수의 블레이크 시 강의가 또한 정지용의 유학 중 수업에 조화를 이루는 양상이다. 유학 생활의 한편으로 정지용은 재일본조선공교신우회 교토지부 서기로 열심히 활동했다. ‘공교’(公敎)는 개신교와 다른 가톨릭을 그리스도교 공식 종가(宗家)라는 뜻으로 부르는 말이다.
‘윌리암 블레이크 시의 상상력’이란 제목의 논문을 쓰고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정지용은 1929년 9월에 귀국해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모교의 교사로 봉직한다는 조건으로 휘문고보가 정지용의 도시샤대학 학비를 대주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지용 프란치스코의 귀국은 서울 종현(鍾峴, 명동) 성당으로도 발길을 들여놓는다. 그는 명동성당 청년회 총무 자리를 맡았다. 그 뒤 1933년에는 조선 천주교 5개 교구(만주의 연길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하는 월간 「가톨릭청년」 편집에 참여한다.
신학 철학 문학을 망라하는 내용으로 대사회 지성지 성격을 띠는 이 잡지는 아트지에 컬러 인쇄까지 하는 당시 조선 사회 최고급의 편집 체제였다. 이 「가톨릭청년」 잡지의 편집위원으로는 윤형중 신부·장면·장발·이동구·정지용이 함께 참여했다. 특히 일반사회 문단의 시인과 작가들로부터 작품을 받아 잡지에 싣는 일은 정지용 시인이 전담했다. 그 결과로 창간호에서부터 시작해 매월 「가톨릭청년」 문예면은 1930년대 문단의 주요한 발표 무대가 됐다.이병기·정지용·이상·신석정·김안서·김기림·조운·유치환·이효상·이태준·박태원·김동리·김소운과 여러 문인들이 더 이 잡지에 등장했다. 이 문인들은 대체로 당시 ‘9인회’를 중심으로 해 문단을 주도한 진용이다.
가톨릭신자가 아닌 문인들까지 천주교 잡지가 개방적으로 포용한 것은 “낡고도 새로운 교회”라고 공언하는 가톨릭의 면모이다. 또한 성경의 마태오 복음 8장에 있는 내용으로서, 신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말씀하는 방법”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 대화의 다리를 놓는 것이 당시 「가톨릭청년」 잡지의 발행 취지였다.
구중서 (문학평론가)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주간, 수원대 국문과 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한국천주교문학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