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25세 나이에 사제가 되어 3개월 정도 후에 작은 준본당의 주임신부가 됐다. 은퇴를 앞둔 연세가 지긋하신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아들뻘 되는 새파랗게 젊은 주임신부로부터 총회장 임명을 받았을 때 상당히 난감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갓 시작하는 본당 공동체를 위해 어려운 책임을 맡으셨다. 사제관 겸 성당으로 쓰던 작은 주택의 안방에 둘이 앉으면, 둘 다 어쩔 줄 몰라 했다. 침묵이 흐를 때 총회장님께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주시고는 당신도 한 개비를 피워 무셨다. 그리고는 편안한 얼굴이 돼 하나씩 말문을 꺼내셨다. 아마도 담배를 한 개비 붙여 주었으니 모실(?) 일을 다 했다는 안도감이 드시지 않았을까? 그동안 만났던 많은 총회장님들이 같은 마음이셨음을 느낀다. 사제가 자신보다 젊지만, 영적인 아버지인 신부의 뜻대로 본당 공동체가 잘 되도록 노심초사하면서 여러 봉사자들을 다독거린다. 부족한 사목자와 함께 해준 봉사자들과 신앙의 모범인 멋진 총회장님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서 서품을 받은 보좌신부가 신자들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어느 노자매님에게는 거슬렸던가 보다. 그래서 ‘왜 어르신들에게 반말을 하냐’고 따졌더니 ‘신부는 백 살이여’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간혹 신부를 위하는 신자들이 ‘신부는 백 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함께했던 총회장님들이 세상에서는 다들 한가락씩 하시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본당에서는 전문가로서의 그런 모습이 퇴색된 느낌이다. 세상살이에서는 책임자로서 지시하는 분인데, 성당에서는 그 윗사람이 더 많다. 사제뿐만 아니라 수도자들의 눈치 아닌 눈치도 봐야 하는 것 같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새로 발견하면서,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란 것 같다. 초대 교회 때는 평신도 봉사자들이 병자에게 성체를 모셔주기도 했고, 교회 운영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자부심을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이 바로 교회를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때로는 순교의 영광을 받기도 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는 어떤 위치일까?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을까?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사목자의 도움을 받아 선교나 교육,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혹시 모든 것을 사제나 수도자가 기획하고, 시키는 것만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이라도 윗사람의 맘에 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성가 번호도 스스로 정할 수 없고, 무엇을 먹을지조차도 사목자의 그날 기분에 맞추어야 할 정도로 평신도 봉사자들은 능력이 없는 것일까?
사목평의회를 비롯한 본당의 여러 조직은 사목자에게 자문(諮問)을 한다. 하지만, 이 자문은 단순한 의견 제시를 넘어서서 사목자가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금은 평신도 봉사자들이 사목자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자신들이 주장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시대다.
사제와 수도자도 세상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평신도 봉사자들도 교회 내부의 일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우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본당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