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신자는 어떤 모습일까? 성직자, 봉헌생활자(수도자), 평신도. 신분에 따라서 기준은 달라질 것이다. 성직자라면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참다운 목자다울 때, 봉헌생활자라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삶을 살고 그렇게 보일 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는 어떠해야 할까? 미사 참례나 성당의 크고 작은 일에 참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일반적으로 본당 총회장이 가장 좋은 평신도일 것이다.
대부분의 총회장들이 그러하듯, 우리 본당 총회장은 거의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본당에 일이 생기면 언제든 참여한다.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신자들과 함께하며, 적지 않은 연세에도 월요일 새벽미사 해설도 한다. 운전할 사람이 없을 때는 본당 승합차 운전사 노릇도 한다. 참으로 열심이고 착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평신도가 본받아야 하는 좋은 평신도상이 과연 이러한 모습만일까?
1983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보편교회법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따라 평신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는 진정한 평등이 있고, 각자의 고유한 조건과 임무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에 협력한다(208조). 평신도들 역시 하느님께로부터 사도직을 위임받았기에 구원의 소식이 세상 모든 이에게 인식되고 수용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 특히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이는 더욱 절실하다. 평신도 각자는 자기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현세 사물의 질서를 복음 정신으로 적시고 완성시켜 현세 사물을 처리하거나 세속 임무를 집행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증거할 특별한 의무도 있다(225조).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이 이렇게 교회와 세상에서 수행하는 사명을 인정하고 격려하여야 한다(275조).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곳은 교회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교회 내에서 하는 역할만으로 열심인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로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본당에서 자주 눈에 뜨이는 신자, 본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신자를 열심하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본당 신부와 가끔 식사라도 한다면 100% 확실하다.
이게 다일까? 그러나 정작 평신도들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뛰어들어야 할 주된 무대는 바로 ‘세상’이다. 이 세상은 각자의 세상이다. 노동자의 세상, 상인의 세상, 교육자의 세상, 공무원의 세상, 법조인의 세상, 의료인의 세상, 설계사의 세상, 학생의 세상, 주부의 세상 등. 각자의 삶의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세상이 있다.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가 끼어들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은 평신도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사랑을 보여주고, 교회를 보여주고, 더 나아가서 교회가 존재하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평신도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평신도의 활동은 특별한 의무이며 권리이다.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어 성당이 밝게 빛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세상이 어둠 속에 있다면 하느님 나라 건설은 까마득히 먼 일일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안착하지 못했다. 자신의 주무대가 교회 내부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을 평신도들이 더 깊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때 공의회의 정신은 우리들의 교회 안에 널리 울려 퍼질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의무와 권리를 잘 이해하고 수행하도록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세상에서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겪는 평신도들의 아픈 상처들을 치료해주고 그들이 다시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나갈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평신도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온천의 역할에 안주하지 말고, 그들이 신발 끈을 다시금 동여매도록 격려하고 밀어주는 믿음직한 보금자리가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