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구가 자리잡은 이곳은 한국교회를 일궈온 신앙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순교의 땅이었다. 박해가 끝나자 순교자들의 가족과 후손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후대에 순교영성을 전하면서 살아왔다.
그중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살아가는 교구 사제들이 말하는 순교영성을 들어봤다.
■ 김성우 성인의 방계 5대손 김학렬 신부
“집안 어른들에게 순교영성 배우며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죠”
“힘들고 어려워 포기하고 싶던 순간마다 순교자들의 ‘바보영성’이 힘을 줬지요.”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의 후손인 김학렬 신부(원로사목자)는 순교자의 영성이 ‘바보영성’이라며 “허허”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순교영성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바보 같지만, 그런 사람들이 사실 세상을 살리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바보영성’.
어쩌면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김 신부의 눈빛과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김 신부의 이런 확신은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익혀온 신앙에서 비롯한다. 김성우 성인의 방계 5대손인 김 신부는 성인이 살았고, 그 무덤이 모셔진 ‘구산(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일대)’에서 성장했다.
“구산공소에서 가족을 통해, 집안 어른들을 통해 신앙을 배웠어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순교신심을 체득할 수 있었어요. 사제가 돼서 우리 교회사를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교우촌인 구산공소의 신앙전수는 남달랐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부터 어머니 품에서 성호경, 주모경 등을 담은 주요 기도문인 ‘천주성교 십이단’을 가르쳤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방학마다 학년별로 모아 공소의 어른들이 362조에 이르는 ‘성교요리문답’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른들에게 집안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성우 성인의 집안은 성인뿐 아니라 성인의 형제들과 그 자식들에 이르기까지 7명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걸쳐 순교했다.
선대에서 후대로 전해 오는 집안 순교자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순교자의 모습을 기억하는 어른들의 경험담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김 신부의 할아버지 김정호(베드로)씨가 말해준 일화는 아직도 김 신부의 기억에 생생하다.
박해로 남한산성에 끌려간 큰 할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던 그는 바가지에 밥과 국을 담아 30리 길을 걸어가 전했다. 그때 옥중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던지 돌아오는 길에 빈 바가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구슬피 울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피부에 와 닿듯이 생생했다.
김 신부에게 순교자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가까운 가족의 일이었다.
김 신부는 “세상이 빨리 변해가니까 잊고 살지만 사실 순교자들이 살아온 세대는 우리와 멀지 않다”면서 순교영성을 체득하고 전수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시대는 순교영성이 없으면 신자로서 올바로 살아갈 수 없어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 없는 것을 최고라고 잘못 생각하고 신앙도 쉽고 가볍게 여기는데 순교영성으로 세상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를 천국을 향한 길로 이끌어주지요.”
김 신부는 순교영성을 말하면서 성경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는 구절을 들었다.
세상은 몸의 편안함이 행복을 준다고 말하지만, 우리 신앙선조들은 이미 천진암강학 시절부터 하느님 안에서 의로운 일과 도리에 맞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김 신부 역시 “신학생 시절과 사제로 살아오면서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라는 김성우 성인의 말씀을 좌우명처럼 되뇌이면서 마음에 새겼다”면서 “유혹이 올 때마다 순교자들의 ‘바보영성’이 제자리를 잡아줬다”고 회고했다.
“순교영성은 바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5,6)의 발현이에요. 하느님 안에 살아가면서 영혼의 행복을 찾은 순교자들처럼 살아가는 것이죠.”
■ 김성우 성인은…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은 1795년 경기도 광주 구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명으로 부르는 ‘성우’는 성인의 자(字)고 이름은 우집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그는 두 동생 만집, 문집과 신앙을 받아들이고 전교했다.
그의 노력으로 구산마을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됐고, 마을은 뿌리 깊은 교우촌으로 변모했다. 성인은 1833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고, 구산에 다시 돌아와 1836년에는 입국한 모방 신부를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했다.
구산에서 회장직을 수행하던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포도청으로 잡혀갔다. 성인은 옥중에서도 교리를 전해 2명을 입교시키면서 신앙을 지키다, 1841년 4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정은 순교자의 5대손 정운택 신부
“하느님 뜻 따라 주어진 삶 충실하게 사는 것도 순교”
“순교영성이란 것은 굉장히 특별하고 우리랑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평범하고 꾸준히, 작게라도 ‘실천’을 하면서 사는 거죠.”
정은(바오로) 순교자의 후손인 정운택 신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면 기적과 같은 특별한 것을 바라지만, 꼭 그 길만이 하느님을 향한 길은 아니다”면서 “남다르게 살려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순교”라고 말했다.
이는 가족들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정 신부에게 전해준 순교영성이었다.
정 신부는 동래 정씨 만천공파인 정은 순교자의 5대손이다. 하지만 정 신부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신이 순교자의 후손임을 모르고 살았다.
“집안의 신심이 깊다는 것은 늘 봐서 알았지만, 제가 순교자의 후손이란 것은 알지 못했어요. 집안 어른들은 선조 중에 순교자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지 않으셨어요.”
정 신부가 ‘순교자의 후손’임을 알게 된 것은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러갈 때였다. 집안에서는 “너는 순교자의 후손이니 신부가 돼야한다”라고 정 신부의 성소에 힘을 불어 넣어줬다.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사제가 되고, 사제로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이 오면 순교하신 선조를 ‘순교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전구를 청하곤 했다.
“우리는 순교영성하면 순교한 분들만 생각하는데, 목숨 하나만 건사하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 신자들 역시 순교영성을 살아간 사람들이에요. 얼마 전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렵게 산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모든 것을 잃은 순교자의 가족과 후손들도 정말 힘겹게 살았어요. 그런데도 신앙을 물려준 것이죠.”
정은 순교자가 잡혀가자마자 정씨 일가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게다가 남은 가족들을 잡기 위해 날마다 포졸이 찾아오는 터라, 가족들은 눈 덮인 산 속 동굴에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그마치 30여 년을 산속을 옮겨 다니며 살던 가족들은 1900년이 돼서야 고향인 단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신앙만큼은 꿋꿋이 간직하고 또 전수했다. 순교자의 후손이니 신앙을 가지라고 말로 한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삶의 모습으로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던 그 신앙을 후대에 전했다.
정 신부는 “사제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녀가 사제가 되도록 신앙을 물려준 부모가 대단한 것”이라면서 “순교자의 후손이 사제가 된 것은 자랑이 아니라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순교자를 생각할 때 그 순교자의 행적과 노력만 보곤 하는데, 하느님이 그분을 사랑하고 보살피셨다는 것도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하느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순교자가 되고 성인이 된 것이죠. 우리 역시 그 성인들만큼이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정 신부는 신자들에게 순교영성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됨을 강조한다. 하느님을 향한 3가지 덕, 즉 “향주삼덕의 완성이자 절정이 곧 순교”라는 것이다.
그는 성 김대건 신부가 옥중서한에서 “천국에서 만나자”라고 한 말을 언급하면서 “‘천국’은 곧 망덕, 희망인데, 정작 우리 삶에 천국이 없다”면서 “현재 삶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고 진리, 즉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 순교영성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향주삼덕이 신망애(信望愛)라는 걸 알아요. 결국은 ‘실천’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내가 아는 만큼이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교영성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은 순교자는…
정은(바오로) 순교자는 신유박해가 끝난 1804년 태어났다. 이기양·정섭·정옥 등 신자였던 사촌 형들이 이미 순교하거나 유배된 이후여서, 그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장한 뒤 조사옥이라는 의원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됐고, 입교한 뒤 모친과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도 세례를 받도록 이끌었다.
모범적인 신앙인으로서 복음 전파에 노력하며 살아오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게 잡히게 됐다. 그는 “잡혔으면 가야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겠는가”하면서 의연히 떠났다고 한다.
그가 떠나자 정은 순교자의 재종손이자 정운택 신부의 3대조인 정양묵(베드로)도 “나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대부(代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라면서 스스로 옥에 들어갔다.
정은 순교자는 1867년 1월 13일 남한산성에서 물 묻힌 백지로 질식사시키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