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9주년-교구 순교영성을 돌아보다] 르포 / 천진암성지를 가다
진리탐구 터전에서 신앙을 싹 틔우다
본래 유교연구하던 천진암 강학회
이벽 참여하며 가톨릭 신앙 눈 떠
참여자들, 기도·금육하며 신앙실천
현재도 매주 토요일 강학회 열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다양한 맛집과 카페가 늘어서 있는 고즈넉한 지방도를 달려 천진암성지로 향했다. 성지로 가는 길목에서는 어느새 와 있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단풍잎과 군데군데 노란 옷을 입은 은행잎을 보니, ‘천진암의 단풍은 가히 칭찬할 만하다’라고 말한 다산 정약용의 시구가 떠오르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퇴촌 읍내에서 약 7㎞를 달리니 저 멀리 대형 십자가와 양 옆의 태극기, 교황기가 눈에 들어왔다. 성지 입구로 들어서 십자가를 향해 언덕길로 오르니, 드넓은 ‘한민족 100년 계획’을 기치로 내건 천진암 대성당 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철골로 지붕이 쓰인 제단 앞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문장이 그려진 머릿돌이 놓여 있었다.
1993년 세워진 머릿돌에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라는 성인의 글과 함께 친필 서명이 새겨져 있다.
제대를 바라보고 왼편에는 높이 22m에 이르는 ‘세계평화의 성모상’이 우뚝 서 있다.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한 성모의 모습을 본 떠 제작, 지난 2013년 모든 국가와 민족의 신앙의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면서 봉헌한 성모상이다. 그 앞에는 십자고상이 누워 있다. 십자고상을 시작으로 대형 묵주 알이 놓여 있어 산길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꾸며뒀다.
창립선조 5위 묘역으로 가기 위해 제대 오른편으로 난 강학로에 들어서니 꼬불꼬불 계곡길이 펼쳐졌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던 다람쥐는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배불리기에 열중이다. 그렇게 5분여를 올라가자 천진암 강학당 터가 나타났다. 예전에 있었던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건물의 머릿돌로 사용됐을 것을 추측되는 바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 신앙의 태동, 천진암 강학회
신앙의 선조 중 한 명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은 1779년부터 1785년까지 약 7년 동안 이곳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권철신은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를 열고, 천주실의와 칠극 등에 관해 연구하고 토론했다. 이벽(요한 세례자)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서학 서적으로 신앙을 탐구하던 중, 권철신과 그의 제자들이 강학회를 연다는 소식에 강학회에 합류했다.
천진암성지 주임 김동원 신부는 “천진암 강학회에서 신앙이 태동한 데에는 이벽 성조의 역할이 컸다”면서 “이벽은 당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면서 서학이 단지 학문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것이며 믿고 실천하고 깨달아야 할 인생의 진리, 영원한 생명의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학회는 원래 유교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벽이 참여하면서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천주교와 비교하고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뜰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강학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음력으로 주일을 준수하면서 재계생활을 할 정도로 신앙을 깨닫고 있었다. 천진암 강학회에서 신앙이 태동했다는 기록은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구회(강학회)는 10여 일 걸렸다. 그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의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이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강학회에서 신앙을 키웠던 이벽 등 성조들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기회일세. 경거망동 말고 북경의 서양 선교사를 찾아가 영세를 받고 올 때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이승훈은 북경의 북당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관련 서적과 성물을 갖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벽은 서울 수표교 자신의 집에서 서적들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한 뒤 선교에 나섰다. 마침내 이승훈에게 이벽과 권일신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조선에 교회가 설립됐다.
성지를 소개하던 성지 부주임 이 그레고리오 신부는 “천진암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신앙을 시작하게 된 곳”이라면서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다락방, 성모님이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를 받은 나자렛,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마찬가지로 성조들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곳”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세계평화의 성모상.
■ 강학회의 전통 계속 이어
이렇게 천진암 강학회에 모인 조선 유학자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신앙은 시작됐다. 그리고 천진암은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김동원 신부는 “선비들의 진리를 탐구하려는 갈망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됐다”면서 “교황청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는 지난 2015년 천진암성지 창립기념미사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종들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들은 진정한 의미의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이라며, “이벽은 ‘교회를 심는’ 도구였고, 한국천주교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고 그 의미를 설명한 바 있다.
현재 천진암성지에서는 강학회의 정신을 이어받고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매주 토요일 천진암강학회를 진행하고 있다. 강학회를 마치고 나면 오후 7시부터 우리나라의 평화와 가정의 안녕 등을 위해 촛불기도를 드린다.
또한 성지 내 가로등도 예전 강학회 당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촛불을 켰던 성조들의 뜻을 이어 촛불 형상으로 만들었다. 김 신부는 “우리 성지의 촛불은 진리를 탐구하는 열정과 진리를 선포하는 선교, 자신을 바쳐 진리를 밝히는 순교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강학당 터를 지나 이벽과 권철신·권일신 형제, 정약종, 이승훈의 묘가 있는 묘역으로 올라섰다. 산으로 둘러싸여 묘역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가득했다. 말없이 누워 있는 우리 신앙의 성조들은 아마도 전국에 퍼진 신앙의 씨앗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