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로 이뤄진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사도들의 모후’
“군 생활 어려움… 성모님과 함께 이겨냅니다”
바쁜 일정에도 ‘주회’ 꼭 참석
공소 궂은일·전례봉사 도맡아
전북 임실 제6탄약창 성요한공소 ‘사도들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10월 16일 주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하고 있다.
“‘사도들의 모후’ 제337차 주회를 시작하겠습니다.” 10월 16일 오전 전라북도 임실 육군 제6탄약창 성요한공소 회합실에서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사도들의 모후’ 주회를 알리는 단장 오현중(율리아노) 상병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졌다.
‘마리아의 군대’를 뜻하는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단원들은 자신들을 교회의 군인이라 여긴다. ‘사도들의 모후’ 단원들은 군복을 입고 주회에 참석하는 진짜 군인이다. 그것도 직업 군인이 아닌 21개월 복무를 하고 사회로 돌아가는 현역 병사들이다. 전국적으로 3000차 주회를 돌파한 쁘레시디움이 속속 나오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에서 337차 주회는 언뜻 이목을 끌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현역 병사들로만 이뤄진 레지오는 ‘사도들의 모후’가 유일하다시피 한 사실을 알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사도들의 모후’는 성요한공소를 관할하는 군종교구 육군 제35보병사단 충경본당(주임 강성표 신부)에서 군선교사로 활동하는 윤석용(스테파노·64·전주 효자4동본당) 선교사에 의해 2010년 1월 3일 창립됐다. ‘사도들의 모후’ 초대 단장도 지낸 윤 선교사는 본지가 ‘사도들의 모후’ 제207차 주회를 취재할 당시(본지 2014년 4월 20일자 24면 보도) “전국 전후방 부대 군선교사들에게 확인했지만 직업 군인 없이 병사들로만 이뤄진 레지오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혹시 있다고 해도 200차 이상 주회를 한 곳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본지가 추가 확인한 결과도 윤 선교사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사도들의 모후’는 최초 보도 이후 2년 6개월여가 흐르는 사이 3평 남짓한 성요한공소 회합실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앞에 흐르는 물이 뒷 물을 이끌고 뒷 물은 앞 물을 밀고 나가는 수심 깊고 도도한 강물의 흐름을 연상시켰다.
이날 주회에는 전체 단원 8명 가운데 휴가를 떠난 3명을 뺀 5명이 참석했다. 부대 안에 있는 단원들은 빠짐없이 참석한 것이다. 다음달 전역하는 최지웅(미카엘) 병장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지난 9월부터 단장직을 맡고 있는 오 상병은 “휴가나 훈련, 경계근무가 있어서 주회에 참석 못하는 단원이 아니면 출석률은 100%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성요한공소 ‘사도들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10월 16일 주회에서 영적 독서를 하고 있다.
‘사도들의 모후’ 단원들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서와 달리 부대 일정에 매인 몸이다 보니 주일 오전 공소 미사 참례와 미사 후 이어지는 레지오 주회 참석은 간절함을 넘어 절박함마저 묻어 나온다. 토요일 오전 공소에 모여 다음날 미사 성가 곡을 정하고 주일미사에서 반주와 독서, 해설, 보편지향기도 등 전례의 모든 부분을 도맡는 것도 ‘사도들의 모후’ 단원들이다. 미사가 끝나고 자리 정리정돈까지 공소에서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곳은 찾기 힘들다.
제337차 주회를 마치고 이제야 단장 직무가 익숙해진 오 상병이 고민을 털어놨다. 오 상병은 공소 미사 반주도 맡고 있어 책임은 더욱 크다. 운전병으로 일하는 오 상병이 담당 간부 요청으로 운전 시간대가 바뀌게 돼 레지오 주회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서운한 소식이었다.
단원들은 매주 주회 지도를 맡는 윤 선교사와 머리를 맞댔다. 반주 봉사는 막내 단원인 김태민(다니엘) 이병이 이어받고 단장은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뽑기로 의견을 모았다.
단원들은 “우리 ‘사도들의 모후’가 절대 흔들리지 말고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굳건해 지자”고 다짐했다.
■ 성요한공소 '사도들의 모후' 병사 Pr. 창단한 윤석용 군선교사
“건강 악화가 은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북 임실 육군 제6탄약창 성요한공소 병사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사도들의 모후’ 지도를 맡고 있는 군종교구 군선교단 윤석용 선교사는 “잘 될지 확신이 없었는데 벌써 창단 7년이 다 돼 간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윤 선교사는 ‘사도들의 모후’가 창단되기 전 서울에서 안정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다 몸에 병이 생겨 직장을 그만두고 전북 김제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제가 건강했다면 ‘사도들의 모후’도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고향에 내려와서도 병원 치료를 계속 받고 있고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구급차에 실려간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의 모후’ 지도를 지금까지 맡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윤 선교사는 32살 된 아들이 있어 ‘사도들의 모후’ 단원들은 막내아들뻘이다. “단원들이 모두 아들 같아서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은총인데 레지오 활동까지 한 단원들이 사회에 나가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사회를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기둥이 되리라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사도들의 모후’는 2010년 1월 창립 단원 14명으로 출발했고 전성기 때는 단원이 30명까지 불어난 적도 있지만 부대 환경 변화에 따라 평균 단원 수 8~9명, 평균 주회 출석인원 5명 내외로 역사의 물줄기를 이어가고 있다.
“꼭 필요할 때마다 단장과 간부 적임자들이 나타나 흔들림 없이 쁘레시디움을 추스르고 이끌어 왔습니다. 민간 본당 레지오에 비하면 적은 인원이지만 ‘사도들의 모후’ 역사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