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성 다블뤼 안토니오, 조선교회 봉헌과 성모성심회 설립’ 주제 학술대회
“수리치골 성모성심회, 초기 한국교회에 큰 역할”
성모성심회 설립 170주년 기념 박해시기에 은사 받기 위해 설립
교회 성장에 성모신심 큰 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주도로 올바른 마리아 교의 따라 활동
신자들 신앙생활·신심에 영향
11월 1일 충남 공주 수리치골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열린 ‘성 다블뤼 안토니오, 조선교회 봉헌과 성모성심회 설립’ 주제 학술대회에서 대전교구 총대리 김종수 주교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1784년 형성된 한국교회는 100여년에 이르는 박해 기간 동안 성직자가 없는 시기를 더 많이 겪었다. 성직자들이 활동하던 기간에도 신자들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볼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한두 번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국교회 신자들 사이에서는 ‘은사회’ 가입을 통해 대사를 얻는 은사 신심이 활발히 번져 나갔다.
대전교구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은사회였던 ‘성모성심회’ 설립과 박해받던 조선교회의 성모님 봉헌 17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에서 성모신심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성모신심이 한국교회 성장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11월 1일 충청남도 공주 수리치골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열린 학술발표회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조선교회 봉헌과 성모성심회 설립’을 주제로 진행됐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대전교구 총대리 김종수 주교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전영준 신부(가톨릭대학교 영성신학 교수)가 ‘유럽에서의 마리아 교의와 신심’을, 조현범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가 ‘수리치골 성모성심회 연구’를,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가 ‘한국교회의 은사회와 성모성심회’를 주제로 논문발표를 이어나갔다.
김종수 주교는 기조강연에서 1846년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교회를 위한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염원했다”면서 “1846년 11월 2일 이곳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를 설립하면서 조선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주교는 “한국교회의 신심과 성장에 중대한 역할을 할 성모신심이 이렇게 시작했다”면서 “충남 공주시의 수리치골은 한국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다른 교리와 마찬가지로 「진도자증」(眞道自證)이나 「성경직해」(聖經直解) 혹은 「성경광익」(聖經廣益) 등 책을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교리 학습의 단계를 넘어서 신앙을 체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사제의 가르침과 교도권의 인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현범 박사는 “한국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를 체험하고 이를 개인적 차원에서 신심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이어 조 박사는 “책을 통한 학습, 개인적인 체험에 이어 성모 신심을 실천하기 위한 신심회가 조직됐는데, 그것이 바로 수리치골에서 설립된 성모성심회였다”고 말했다.
수리치골 성모성심회 설립의 주역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였다. 신심회를 조직하고 이를 승인하는 것은 해당 지역의 직권자가 지닌 고유한 권한이다. 페레올 주교는 성모성심회 설립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또한 신학생 시절부터 프랑스 성모성심회 활동에 깊이 관여한 바 있었던 다블뤼 신부도 성모성심회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이에 앞서 성모에 대한 교의를 주제로 발표한 전영준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전한 마리아 신심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안전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정화된 운동이었다”면서 “때문에 우리나라 신자들은 마리아 신심을 비교적 과도하지 않은 가운데 건전하게 실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 신부는 “최근에 와서는 마리아 신심 실천 양상이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면서 “오늘날 신자들은 마리아 신심 운동을 어긋날 정도로 과도하게 실천하지 않기 위해, 늘 마리아 교의를 올바로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정환 신부는 “박해를 받고 있던 한국교회는 성직자가 부족해 성사의 은혜를 받기가 힘들고, 언제 다가올 지 모르는 죽음에 직면해 있었기에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은사회는 꼭 필요한 신심단체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신부는 “성모성심회는 박해를 받는 한국교회가 성모 마리아의 보호 아래 무사히 활동하는 염원도 담아 창립됐다”면서 “그런 까닭에 박해를 받는 중에도 선교사와 신자들 안에서 보편적 신심단체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성모성심회는 박해 시기뿐만 아니라 박해 이후에도 전례력인 첨례표에 기재될 만큼 공식 단체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67년을 마지막으로 첨례표에서 성모성심회의 이름은 사라졌다. 성직자가 늘어나 성사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은사회라는 단체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그 신심은 형태를 바꾸어 개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카풀라와 성모무염시태 패의 착용, 묵주기도를 꾸준히 바치는 전통 등은 지금도 본당, 단체, 개인별로 전례와 기도 안에서 행하고 있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학술대회 뒤 봉헌된 성모성심회 설립 170주년 기념미사 강론에서 “우리 선조들의 신앙과 삶은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불가분의 관계”라면서 “이러한 성모신심은 오늘날, 세계가 놀란 성장과 교세유지를 기록하는 한국교회에 있어서도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신심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성모님을 따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평화를 이루는 증거의 삶을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