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현대교회가 미지근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80~90년대의 한국교회의 뜨겁고 활발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교회가 힘이 많이 빠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미사참례율 감소를 시작으로 세례자 수가 감소하고, 성소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신자들의 연령대 또한 급격한 노령화의 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예전의 그 뜨거움이 그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의 본성은 불과 같은 뜨거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불을 꺼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은총의 뜨거움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따라 더 뜨거워질 수도,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가장 뜨거웠을 때는 성령께서 교회에 내리셨던 성령강림 이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 만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사도 2,41 참조).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불구자에게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말하면 불구자가 바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온 교회는 성령께서 주시는 뜨거운 은총의 선물로 이렇게 온 백성의 호감을 얻고 나날이 번성해갔습니다.
물론 초대교회 때라고 해서 모든 교회가 다 뜨거웠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요한 사도를 통해 미지근하기만 했던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경고를 하십니다. 지금의 터키에 위치한 라오디케이아는 지리적으로도 만년설이 있는 추운 고산지대와 뜨거운 온천이 나오는 지역과의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도 믿는 건지 마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미적지근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신앙의 뜨거움은 세상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가난과 박해와 순교를 선택했던 초대교회 선배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미지근한 신앙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에서도 잘 살고 덤으로 천국도 들어가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주님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문제점을 이렇게 짚어내십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17)
재물은 신앙의 뜨거움을 꺼버리는 독과 같습니다. 교회는 가난할 때 뜨겁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돈의 행렬을 보며 교황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불은 물과 함께 할 수 없듯이, 신앙도 세상의 영예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뜨거움은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처럼 뜨겁고 싶다면, 교회도 세상을 거슬러 먼저 물질적으로 가난해지려 노력해야합니다.
성 패트릭에 의해 교회를 받아들인 아일랜드는 현재까지 그 초대교회의 뜨거움을 이어왔던 가톨릭국가였습니다. 영국이 성공회를 강요하며 700년 이상 박해했지만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오던 뜨거움이 근래 20여 년 만에 미지근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박해도 없어지고 물질적으로도 잘 살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영국을 넘어서면서 성당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진정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요해지면서 신앙이 약해지는 일은 마치 법칙과도 같이 어떤 교회도 피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삼용 신부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겸 교구 영성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