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 관련 교회 움직임 종합… 전국서 시국선언·시국미사 잇따라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민주주의 회복 위해 교회도 힘 모은다
주교회의 정평위 시국선언 이어 남녀 수도자들도 “책임있는 사과” 강조
안동·광주·청주·제주 등에선 미사 봉헌
대구·광주 신학생도 ‘관련자 엄벌’ 촉구
11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시민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국정 농단을 자행하고 부당한 사익을 추구한 것으로 드러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헌정 사상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중·고등학생들과 가족 단위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대통령 하야와 탄핵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지난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해 가톨릭대 교수와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등 한국교회도 정권의 회개와 진정한 반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신앙인들의 반발과 시국선언이 계속 잇따르고 있어 대통령의 중요 결단이 없는 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을 것으로 우려된다.
‘최순실 게이트’ 사건에 대한 교회 내 시국선언이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한 11월 4일에는 “대통령 사과에 진정성이 없으며 책임 회피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비등했고 교회 내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는 이날 오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무조건적으로 직무에서 퇴진해야 하며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공의로운 정치적·사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또 “대통령 대국민담화문은 진정성이 없는 원론적인 수준에 머문 채,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 자세히 밝힐 수 없다는 말로 책임회피를 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국정 혼란에 대한 책임과 수습 능력이 없다고 지적한 이들은 “국민들과 사회단체와 연대해 이후 상황과 과정을 주시하며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이날 시국선언문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국정을 맡기고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 수사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부당하게 모은 재산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헌납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속죄하라”고 말했다.
또 “아직 전모가 다 드러나지 않은 국정 농단의 또 다른 주역들이 있다”며 “그들은 새누리당 국회의원들, 재벌, 국정원과 정치검찰, 부패한 수구기득권 언론들”이라고 비난했다. 오늘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러한 ‘비선실세’들을 과감하게 청산하지 않는 한 이 같은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안동교구 사회사목협의회(정평위·가농·생명환경연대)와 천주교정의구현 안동교구사제단은 11월 7일 오후 8시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박근혜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주권자로서 국정붕괴 사태를 직시하고, 참여와 행동으로 이 터에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한다”며 책임자 처벌과 문제 있는 정책들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이어 “보수와 진보, 지역감정, 세대 갈등의 분열을 넘어 함께 국가 공동체를 일구어 가자”고 호소했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1월 7일 오후 남동5·18기념성당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청주교구 정평위도 이날 오후 성모성심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열었고, 제주교구 정평위도 같은 날 오후 7시30분 제주시 광양성당에서 ‘고 백남기 임마누엘 위령미사 및 시국미사’를 거행했다. 전주교구 정평위도 11월 9일 중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젊은 대학생들의 분노도 들끓고 있다.
대구가톨릭대 신학대학 신학생과 수도자, 광주가톨릭대 신학생회는 11월 2일 공동으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대통령의 진정 어린 사과와 책임자 엄벌을 촉구했다. 대구 신학생과 수도자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공유하는 분노를 넘어 신앙인이자 사제직을 준비하는 신학도로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소명과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끊임없는 자기 성찰 속에서 이 정권의 폭력 아래 희생되고 고통받은 모든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며 “민주주의의 소생을 위해 시대의 분노와 절망을 품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대전가톨릭대 학생자치회는 11월 3일 시국선언문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 이념에 조금도 부합하지 못한 인물이며 대한민국 주권이 지금까지 부패한 세력 손에 넘어가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교회 신학도로서 그리스도 뜻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향후 거취에 대해 국민의 뜻을 따르고 진정으로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는 11월 4일 시국선언문에서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복음의 기쁨」 제183항을 인용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진실을 밝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것 ▲최순실 일가 등 비선 권력자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 ▲수사 당국은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이 사태의 모든 책임자들을 공정하게 처벌하고 정치권은 국정 쇄신을 도모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또 “이 땅의 선배 세대는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피와 땀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 경제발전을 이뤄냈지만 지금 박근혜 정권은 부정부패한 비선 실세를 끌어들여 국정을 농단했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청년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학생사도로서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땅을 만들고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의에 맞서겠다”고 다짐했다.
은성제 신부(서울대교구 대학생사목부)는 이날 시국미사 강론을 통해 “우리 모두는 사랑과 평화 안에 기뻐할 수 있는 나라를 위해 오늘 여기 모인 것이며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것”이라며 대통령 퇴진을 주장했다.
시국미사도 잇따라 봉헌될 예정이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11월 11일 대흥동주교좌성당에서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대전교구 시국미사’를 봉헌한다. 미사 후 사제단과 참례자들은 성당에서 대전역까지 가두행진도 펼친다.
부산교구 정평위는 11월 14일 오후 7시30분 주교좌중앙성당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를 봉헌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1월 7일부터 전국 각 교구별로 ‘박근혜 퇴진과 민주회복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개최할 방침이다.
대통령에 대한 비난 여론은 갈수록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5%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역대 대통령 지지율 조사 역사상 가장 낮은 수치다. 일부에서는 ‘4·19 혁명’ 당시와 비견하며 이번 사태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중국·미국 등 주요 해외 언론을 통해서도 국정농단 사건이 회자되며 국가 위신조차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다.
11월 5일 오후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시민 촛불집회에는 주최측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집회 참가자 수는 줄잡아 20만 명을 육박했다. 부산, 광주는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대구에서도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분노한 국민 여론의 현 주소를 보여준 셈이다.
집회 양상은 과거 국정교과서 논란, 일본군 위안부 합의 논란,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등 예전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부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해온 형태를 넘어 가족 단위 참가자, 넥타이를 맨 직장인, 대학생은 물론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일반 남녀노소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11월 12일 전국적인 항의 집회를 또 다시 개최할 방침이다. 그때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이 없다면 지금보다도 더 큰, 전 국민적으로 저항의 불길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권오광 대표는 “집권 4년간 세월호와 백남기 농민 사건 등을 볼 때 박근혜 정권은 무능하고 국민과 소통을 거부해왔다”며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최순실로 인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행진하는 중고생들.
대구가톨릭대 신학대학 신학생들이 11월 2일 촛불을 들고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11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침묵 시위’.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
정정호 기자 piu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