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하다가 “미사 중 신부님이 성작을 손에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하는 부분을 외우실 수 있는 분 손 들어보세요”라고 하면 거의 한 명도 들지 못합니다. 집중하라고 종까지 칠 정도로 미사의 핵심 경문이고, 수천 번은 들었을 텐데도 좀처럼 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단체로 시켜보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 죄를 용서하려고 흘릴 피다…”라고 얼버무립니다. 그나마 피가 죄를 용서하는 값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도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서 시켜도 “계약”을 머리에 떠올리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경문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기억’하라고 미사를 제정하신 것일까요? 바로 미사가 당신과의 ‘계약’임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계약은 예수님만 기억하고 계시면 되는 것처럼 미사 안에서마저 우리 머리에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계약은 서로간의 ‘필요’에 의해 맺어집니다. 아무와 친구하지 않고 아무와 혼인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필요하니까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집이 필요해야 계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돈을 받고도 집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기죄로 고발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은 그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계약이 끝난다는 말은 관계도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요에 의해 맺는 계약이지만 그 계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지켜야 하는 의무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계약이 필요할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그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값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죄를 용서받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이 보속하는 등의 노력으로 죄가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은 지상에 내려오셔서 굳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십자가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위한 당신 ‘피’를 들고 우리와 계약을 맺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에게 해야 하는 의무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다면 계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파기되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미운 마음을 지닌 채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성체를 영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것을 강탈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 없이 행하는 미사는 그분께 고통만을 드리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겸 영성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