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철 신임 인천교구장 임명] 삶과 신앙
나눔과 배려, 학식 두루 갖춘 ‘준비된 목자’
‘신앙의 스승’ 부모님으로부터
깊은 신앙 고스란히 물려받아
한국교회 최초 실천신학 박사
교리교육 관련 각종 저서 펴내
■ 신앙의 교과서
제3대 인천교구장에 임명된 정신철 주교의 삶은 ‘신앙의 교과서’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 5월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갑작스럽게 선종하면서 6월부터 교구장 서리로서 슬픔에 빠진 인천교구를 추스르고 이끌어온 정 주교가 11월 10일 인천교구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이는 역시 가족이었다.
정 주교보다 두 살 위 친형인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정대철(대철 베드로·54) 교수는 “동생 주교와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족기도를 꼭 드리던 생각이 제일 먼저 난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와도 가족기도를 바치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고 부모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덕목은 ‘가족 신앙공동체’였다”고 밝혀 정 주교의 신앙은 뿌리 깊은 ‘내리 신앙’임을 전했다.
정 주교가 ‘대수도원장’이라 불렀던 아버지 정종심(바오로·84) 옹은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유대철(베드로) 성인과 조신철(가롤로) 성인을 따라 지음으로써 아들들을 하느님께 봉헌했다. 결국 큰 아들은 사람의 몸을, 작은 아들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이들로 성장시켰다.
정 주교의 어머니 박순정(도나타·81) 여사는 한국교회 신자들 특히 인천교구 신자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신앙의 증거자이자 인천지역 복음화의 선구자인 박순집(베드로·1830~1911)의 후손이다. 삶이 곧 신앙인 부모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신앙은 정 주교를 ‘준비된 사제’로 자라도록 인도했다. 정 주교는 초등학생 때부터 복사를 서면서 성소를 키워가기 시작했고 사제가 아닌 삶을 꿈꾸기는 어려웠다.
1970년 인천 주안1동성당에서 정신철 주교가 첫 영성체를 하고 있다. 인천교구 홍보실 제공
■ 사제이자 학자
1993년 1월 29일 정 주교가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야 6,8)를 서품 성구로 삼아 사제가 된 이후에도 부모님은 정 주교에게 신앙의 스승이었다. 특히나 어머니의 기도는 정 주교가 사제가 된 뒤에 더 뜨거워졌다. 정 주교가 1993년 2월~1994년 2월 첫 부임지인 인천 삼정동본당 보좌로 1년간 사목하고 1994년 6월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 교리사목 고등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자 어머니 박순정 여사는 아들에게 기도를 담은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 분량은 두꺼운 원고지철 14권이나 됐다. 편지글 중 일부를 모아 1995년 책으로 만든 「아들아, 성인 사제 되어다오」는 사제 어머니의 모정과 애환을 절절히 표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기도와 편지는 정 주교가 외롭고 힘든 8년간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교회에서는 최초로 실천신학 분야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밑거름이 됐다.
어머니의 든든한 기도에 힘입어 보낸 8년 동안의 프랑스 유학생활은 정 주교가 걸어갈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2002년 6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같은 해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부천 역곡2동본당에서 짧은 보좌신부 생활을 거친 정 주교는 이후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겸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인천교구 성소국장으로 봉직했다.
정 주교는 인천가톨릭대 교수와 성소국장으로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바쁜 시간을 쪼개 교리서 저술에도 힘써 「교리교육 문헌 해설」(2008), 「저는 믿나이다」(2010) 등을 펴냈고 저술활동은 주교가 된 이후에도 이어져 「교리교육의 역사」(2015)를 썼다. 이 외에 「간추린 가톨릭교회 교리서」, 「한국 천주교 교리교육 지침」 등 다수의 교리서 저술에 참여했다.
1993년 1월 인천 답동성당에서 사제품 받을 당시 정신철 주교. 인천교구 홍보실 제공
1993년 첫 부임지인 인천 삼정동본당 보좌 시절 주일학교 여름캠프에 함께한 정신철 주교. 인천교구 홍보실 제공
■ ‘직지대모’ 고 박병선 박사와의 인연
정 주교가 프랑스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1998년 처음 만나 신앙적, 학문적으로 깊은 교류를 맺은 ‘직지대모’ 고(故) 박병선(루갈다·1923~2011) 박사와의 인연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박 박사는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고 한국에 반환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때였다. 정 주교는 박 박사의 노력에 공감하면서 영적인 응원을 보냈고 약탈 145년만인 2011년 5월 비록 ‘영구대여’라는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외규장각 도서가 국내에 돌아오는 데 무형의 기여를 했다. 선종 전 병자성사를 받으며 정 주교와 각별한 인연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던 박 박사는 인천교구에 장학금 2억 원을 기탁했고 생전에 소장했던 학술자료(도서 1286권, 비도서 68점 등)와 유품을 인천가톨릭대학교에 기증했다. 인천가톨릭대는 박 박사 선종 1주기에 맞춰 2012년 11월 인천가톨릭대 도서관에 ‘루갈다 아카이브’를 개관해 박 박사가 정 주교와 맺은 소중한 인연을 기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열린 사제 야구단 친선 경기에서 투수로 활약 중인 정신철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14년 겨울 정신철 주교가 교구 청년들과 함께 연탄을 나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어린이와 청년들을 사랑한 주교
정 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후 프랑스 유학 전후에 보좌신부로만 사목했을 뿐 본당 주임을 맡지 못한 사실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느님을 찬양하던 보좌신부 시절이 그립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간직한 정 주교는 인천교구 총대리 주교와 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던 약 6년여 기간에도 가톨릭아동청소년재단 활동 등을 지원하고 청년, 청소년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던 목자로 기억된다. 특히 매년 겨울마다 교구 청년들과 인천시내 저소득 가정을 찾아 직접 연탄을 들고 나르던 정 주교의 까매진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젊은 신부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인천교구 사제 야구단을 만들어 강속구 투수와 강타자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하던 정 주교였다.
아들이 2010년 4월 29일 주교가 된 모습을 본 박순정 여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교 임명 소식을 들은 날 온종일 기도하다 눈물을 흘리고 다시 기도하다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며 “아들 신부가 주교가 된 것은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영광”이라고 감격했었다. 6년여의 시간이 흘러 정 주교는 인천교구장이 됐다. 인천교구와 한국교회, 인천 지역사회 모두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잘쏘니 정’. 정 주교가 인천교구 성소국장을 맡고 있을 때 직원들 영명축일 선물을 잊지 않고 때때로 간식을 잘 챙겨주는 등 주변을 항상 배려해 직원들이 프랑스어 발음으로 붙여준 별명이다. 나눔과 배려의 덕목, 젊음과 학식을 한 몸에 지닌 신임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에게 거는 한국교회의 기대가 크다.
■ 약력
1964. 10. 22. 인천 송림동 출생
1983. 3.~1991. 2.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1991. 3.~1993. 2.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93. 1. 29. 사제 서품
1993. 2. 22.~1994. 2. 1. 인천 삼정동본당 보좌신부
1994. 6.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 교리사목 고등대학원 유학
2002. 6.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 박사(신학박사, 실천신학)
2002. 8. 1.~2003. 1. 19. 부천 역곡2동본당 보좌신부
2003. 1. 20.~2010.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겸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2009. 1. 12.~2010. 6. 15. 인천교구 성소국장
2010. 4. 29. 인천교구 보좌주교 임명
2010. 6. 16. 주교 서품
2010. 10. 13.~2016. 3. 15. 주교회의 해외선교 교포사목위원회 위원장
2010. 10. 13.~현재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2016. 3. 15.~현재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2016. 6. 4. 인천교구장 서리 임명
2016. 11. 10. 인천교구장 임명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