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이 되어
“오는 길에 봤는데…, 단풍이 너무 곱게 들었더라….”
자신이 본 가을 풍경을 들려주는 박차이(실비아·68·인천교구 부천 역곡2동본당)씨의 얼굴은 설명을 더할수록 열기에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박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감상에 젖어드는 이는 시각장애 1급인 김정희(젬마·72·서울 성라파엘사랑결준본당)씨.
박씨의 안내로 지하에 위치한 성당에 들어서는 김씨도 익숙한 몸짓이어서 겉으로 봐선 시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다.
박씨의 대녀인 최윤지(유스티나·53)씨도 일찌감치 나와 사랑결성당 안팎을 쓸고 닦고 있다.
매 주일 오전 한국교회 최초의 시각장애인 본당인 성라파엘사랑결준본당(주임 김용태 신부, 이하 사랑결본당)이 위치한 서울 개포동 하상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박씨와 같은 안내봉사자가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어 준다면 최씨 같은 봉사자들은 손과 발 역할을 하며 ‘빛’이 되어주고 있다.
한마음이었다. “아름다운 눈이 되어주면 좋지 않을까.”
자신을 교회로 이끈 대모의 권유로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은 게 1993년이니 꼬박 24년째 누군가의 눈의 되어왔다. 그 사이 같이 봉사를 시작한 남편도 주님의 품으로 떠났지만 박씨의 주위에는 더 많은 ‘눈’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눈들은 누군가에게 ‘빛’이 되었다.
집을 나서 교통수단을 세 번이나 바꿔 갈아타면서 찾는 사랑결성당이지만 지금껏 그 길이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 덕일까, 사랑결본당을 찾는 이들 가운데 그의 봉사를 받아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봉사라니요…. 그저 주님이 주신 은총에 겨워 그 은총을 나누고 있을 뿐입니다. 은총을 계속 부어주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사랑결본당에는 박씨와 같이 ‘빛’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인 후 그 빛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남성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바르티메오 공동생활가정’에서 사회재활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오혜성(세라피아·50)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난 2006년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은 그는 사랑결본당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에파타 합창단’을 돕는 일이라면 두 팔 다 걷고 나선다. 합창단 회계일 등 크고 작은 일들 뒷수발은 물론이고 공연 연습이 있을 때도 빠지는 법이 없다. 외부에서 초청 공연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들 곁을 지킨다.
“누구보다 순수한 면이 많은 이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매 주일 오전 11시 서울 개포동에 자리한 성라파엘사랑결성당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주일미사가 봉헌된다. 주일미사에 참례한 시각장애를 지닌 신자들이 점자악보와 점자정보단말기 등을 이용해 성가를 부르고 있다.
■ ‘빛’으로 서기
주일 오전 11시에 봉헌되는 사랑결본당 교중미사.
미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도 훨씬 전부터 발걸음이 ‘조심스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사랑결성당 인근은 물론이고 경기도 의정부, 일산, 성남, 용인 등지에서도 미사를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는 이들의 손에는 흰지팡이가 하나씩 들려있다.
봉사자의 손을 잡고 성당에 들어선 이들은 몇 군데를 더듬더니 이내 ‘제 자리’를 찾아간다. 습관적으로 앉는 자리가 어느 새 자기 자리가 된 셈이다.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인사부터 오가고 다음이 손이다.
“어…, 시몬씨 왔어?” “데레사, 오늘은 좀 늦었네.”
그렇게 200석 남짓한 성당은 늘 ‘빛’을 갈구하는 이들의 빛으로 가득 찬다. 2011년 준본당으로 승격된 이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벌어지는 사랑결본당의 모습이다.
사랑결본당의 모태가 된 서울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회장 윤재송)가 장소를 빌려 어렵게 미사를 봉헌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공간을 빌려 쓰는 처지라 제대로 된 제대나 감실 마련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십자가의 길’을 설치했다가 미사가 끝나면 다시 급하게 걷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미사’가 봉헌된 11월 20일.
사랑결성당은 감미로운 성가로 넘쳐났다. 찬미 가득한 노래를 토해내는 ‘에파타 합창단’ 단원들의 손은 연신 점자악보 위를 내달렸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화음은 신기에 가까웠다.
성가대의 선창에 따라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의 손도 악보 위를 오갔다.
사랑결본당 신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 성체를 영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이 미사 중 유일하게 자신의 ‘고정석’을 벗어나는 때다. 봉사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사제 앞으로 나아간다. 성체를 영하고는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시간이 가장 긴장돼요. 그리고 제일 감사드리는 때도 이 시간입니다.”
미사가 끝난 후 성당 옆 복지관 식당에서는 조촐한 식사자리가 마련된다.
사랑결성당이 자리한 인근 본당에서 나온 봉사자들이 안내는 물론이고 식사 배식과 설거지까지 맡는다.
비신자임에도 30년 넘게 복지관에서 봉사해오고 있는 김미영(62)씨도 끼어있다. 대치동본당에 다니던 친구 권유로 봉사에 나서게 된 김씨 마음도 다른 봉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나 답답할까, 그들의 눈이 되어주자는 생각에서 한 일이 지금껏 이어져왔습니다.”
가진 조그만 재능이나마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지면서 남편과 자녀들까지 봉사자로 끌어들였다.
“오히려 감사할 때가 많아요. 사람이 어떨 때 빛이 날 수 있는지 체험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성라파엘사랑결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 본당의 미사는 시각장애우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더욱 빛을 발한다.
사랑결성당 인근 개포동본당에서 봉사 나온 신자들이 점심 식사를 함께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1급 시각장애를 지닌 왕육상(마태오)씨의 오르간 연주가 미사를 더욱 거룩하게 이끈다.
■ ‘빛’을 기다리며
“지난 세월 주님이 안 계셨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주님만이 저희의 유일한 희망이며 빛이십니다.”
사랑결본당 사목협의회 양지수(미카엘·68) 부회장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빛 그 자체다.
1970년 22살 나이로 월남전에 참전한 그에게 세상은 까마득한 어둠, 절망부터 안겼다. 파병 5개월 만에 전투 중 두 팔과 두 눈, 한쪽 귀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함께 작전에 참가했던 두 동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져가는 상황에서 그가 매달린 존재는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살려주세요.”
종교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시 살아나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가슴 속으로 외치다 의식을 잃었다.
귀국 후 재활훈련을 하며 주님의 빛을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는 줄곧 이웃을 위한 삶이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길을 찾다 1979년 서울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 설립을 위해 뛰어들었다. 30년 넘게 선교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에든 앞장섰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주님의 진리를 담아낸 말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지닌 탈렌트가 뭔지도 모르고 뛰어든 수많은 일들 속에서 하느님을 깨우칠수록 이웃을 향한 사랑도 깊어갔다.
“볼 수 없는 저희들은 자기 주위에 있는 이들을 통해 존재가치를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저희에게 이웃은 주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사랑결본당의 오늘은 그와 같은 이들이 키워낸 빛의 성인 셈이다. 빛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 서로에게 빛이 된 이들이 새로운 빛을 기다리고 있다.
더 화려한 공간이 아니라 더 많은 빛을 담아낼 새 성당이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 빛으로 살아갈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빛 안에 모여 서로에게 더 밝은 빛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도움주실 분 1005-401-821301 우리은행, 성라파엘사랑결성당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