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묵시록에는 심판 때 구원된 이들이 이렇게 표현됩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묵시 15,2)
불이 섞인 바다는 지옥을 뜻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베드로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불바다를 마치 유리 위를 걷듯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의 숫자를 상징하는 ‘666’을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는 이들은 무언가와 싸워서 승리한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하는 그 원수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가르쳤습니다. 전쟁에서 누가 적인지도 모르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교황청이 발행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인간이 뱀의 유혹을 받아 생기게 된 ‘세 가지 오염된 본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세상은 오염되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먼저 자기 자신도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혹을 이길 힘을 잃어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 타락하게 된 것은 뱀의 유혹에 의해 생겨난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이라는 ‘세 가지의 욕망’에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천주교 요리문답」 179번 질문에서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라고 물으면,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현대의 가톨릭교회교리와 비교해보면 ‘마귀’는 곧 교만으로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 그분을 거슬러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이 ‘반이성적 자기주장’이고, ‘육신’은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관능적 쾌락’을 말하며, ‘세속’은 세상의 모든 영화를 말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욕망은 모두 뱀이라는 자아에서 나오고 이 뱀은 ‘여섯째 날’ 창조된 동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6’은 아담이 제외된 불완전한 수이고 ‘7’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완전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싸워서 이겨야하는 동물적 본성은 그 여섯째 날 만들어진 동물인 뱀에게서 나오는 세 가진 원수, 즉 ‘삼구’이고 이것을 ‘666’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당신을 증명해보라고 교만함을 부추기는 ‘마귀’,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육신’, 그리고 자신에게 절하면 주겠다던 헛된 영화인 ‘세속’을 이기셨기에 우리 모두의 구원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 하라고 명하십니다(마태 16,24 참조). 결국 우리가 싸워 못 박아야 할 원수는 우리 자신이고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세 가지 욕망, 즉 ‘삼구’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이 삼구와 싸워 승리해야만 지옥의 불바다를 마치 유리를 밟는 것처럼 밟고 서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더 이상 원수와 친하게 지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교구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