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를 틀면 예전에 비해 음식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훨씬 많이 보게 됩니다. 맛을 찾고 배부름을 추구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내에서도 단식을 하거나 절제를 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밥은 꼭 챙겨먹어야 한다고 걱정해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 년에 딱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 아침을 거르는 것만이 의무로 남게 됐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끼니를 꼭 챙겨야 한다는 말을 초대교회 신자들이 들었다면 그들도 수긍을 했을까요?
루카복음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갔을 때, 예수님을 보자마자 ‘메시아’이심을 알아본 시메온과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특히 한나 예언자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루카 2,37) 여자였습니다. 루카가 한나의 삶이 ‘기도와 단식’이었음을 굳이 써 놓은 이유는,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기도와 단식만큼 좋은 수단이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끈질긴 마귀를 쫓아내시고는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마태 17,19)라고 여쭙는 제자들에게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마태 17,21)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기도와 단식의 병행은 초대교회에서도 이어지는데, 사도행전에서도 교회가 즐겨 단식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예배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바오로)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시고(사도 13,2 참조), 이어 교회가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파견했습니다(사도 13,3 참조). 그렇게 파견된 바오로는 심한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기도와 단식으로 그런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2코린 6,5 참조). 즉, 초대교회 때 또한 성령을 받기 위해 단식하고 또 그 받은 성령을 전해주기 위해 단식했으며 복음을 전할 힘을 얻기 위해서도 ‘기도와 단식’은 짝꿍처럼 함께 병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도 수많은 사례들이 있겠으나 단적으로 다윗이 바쎄바와의 불륜으로 낳은 아기가 병이 들자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샜다”(2사무 12,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단식은 기도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영적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자들조차도 단식보다는 건강을 더 챙기는 느낌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적지 않겠지만, 왜 단식으로 육체의 욕망을 최소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도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단식이 한 끼 굶은 값으로 이웃을 돕는 목적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단식한 것이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데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셨던 것입니다. 육체가 절제될수록 영적인 힘은 커집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육체가 힘든 것은 좋은 일입니다. 육체가 편하면 정신이 흐려져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식가들이 돈 버는 시대에 우리는 되레 단식을 외쳐야하는 입장입니다.
성령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기도와 단식이 마치 두 다리, 혹은 두 팔과 같이 함께 가야 함을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을 즐겁게 하면 영은 괴롭습니다. 영을 행복하게 하려면 육체를 괴롭혀야 합니다. 그래서 단식은 영적 생활을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오던 기도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육체의 만족이 아닌 영적 만족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돼야겠습니다.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교구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