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어느 해보다 힘겨웠던 한 해로 기록될 듯하다. 온 나라를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은 유례없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 남북 화합의 상징인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백남기(임마누엘) 농민 사망과 부검영장 강제집행 시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한일 위안부 합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 발표 등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련의 사건들이 올 한 해 끊임없이 일어났다.
어두울수록 빛은 밝게 빛나듯 한국교회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며 한국사회가 겪은 고통과 좌절에 함께했다. 암울한 시대에 등대와 나침반으로서의 역할과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한국교회가 걸어 온 지난 1년을 되짚어 본다.
7월 18일 왜관수도원에서 생명평화미사 봉헌 후 사제·수도자·신자 등이 인근 미군 부대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민주주의 회복에 나선 한국교회
예년 같으면 예수 성탄 대축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12월 7일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는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이라는 무거운 제목의 발표문을 냈다. 이 발표문에서 한국교회는 “대통령은 자신의 퇴진에 관해 정략적 타산으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면서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의 요구를 내놨다. 국회에는 “국민이 부여한 탄핵소추권을 행사할 의무가 있다”고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를 선택이 아닌 당위로 규정했다. 한국교회의 바람대로 국회는 이틀 뒤인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찬성 234표로 가결시켰다. 무소속을 포함한 야당 외에 여당에서도 60표 이상이 동참한 압도적 가결이었다.
한국교회가 대통령의 퇴진과 국회의 탄핵 의무를 강조할 만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파괴됐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게 나라냐?”라는 자조적인 물음이 터져 나왔다. 교회 내 소수 신자들은 아직도 “왜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느냐”며 민주주의와 공동선 회복을 외치는 교회 목소리를 왜곡하기도 했다. 교회는 국가와 국민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이 파괴됐을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근본 가르침이다.
10월 24일 JTBC가 국정농단 사태의 주인공인 최순실씨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태블릿PC를 공개하자 성소를 키우고 있는 신학생들이 먼저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10월 28일 수원가톨릭대학교를 시작으로 전국의 가톨릭대 신학생들이 박 대통령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 국정농단 책임자들의 처벌을 외쳤다.
11월 1일에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해 시국선언문을 내고 “대통령은 과오를 뉘우치고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후 11월 한 달 내내 전국 각 교구와 수도회는 시국미사 봉헌과 촛불 행진을 통해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는 교회 목소리를 일관되게 드러냈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한인사제단이 11월 18일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등 해외 한인 사제단도 고국의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보고만 있지 않고 작은 힘이나마 보내왔다.
12월 3일 국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자 한국교회는 9일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국가적으로 중대한 시점에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을 발표했고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유흥식 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대전교구장)는 대통령 탄핵안 국회 통과를 지켜본 뒤 “이제부터 내딛는 역사적 걸음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보고 전 국민의 지혜를 모아 신중하고 슬기롭게 혼동과 위기의 순간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꽉 막힌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한 노력
분단 70주년이었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남북 관계는 분단 이후 최악이었다. 대화와 협력의 실마리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1~4일 한국 주교단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 대화와 협력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기대가 싹텄다. 또한 한국교회 사제가 예수 부활 대축일이나 예수 성탄 대축일 등에 정례적으로 북한 신자들과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다는 원론적인 남북 간 합의도 나왔다.
불과 한 달 뒤인 올해 1월 6일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제4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이 모든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월 7일에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까지 이어졌고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조치를 취했다. 남북 화해와 협력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개성공단마저 문을 닫자 한국교회에서는 “개성공단만은 살려야 한다”는 안타까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3월 6일에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호소문’을 내고 “남북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개성공단 폐쇄는 재고돼야 한다”고 남북한 당국에 호소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해를 고스란히 당해야 했던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의 피맺힌 절규와 교회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개성공단의 문은 열릴 줄 몰랐다. 9월 9일에는 북한이 제5차 핵실험까지 벌이면서 개성공단 재가동의 실낱같던 희망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주교회의 정평위는 다시 9월 12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호소문’을 내고 ▲북한의 핵실험과 핵무기 개발 포기 ▲정부와 세계기구의 평화 구축을 위한 북한과 대화 추진 ▲한반도 주변의 핵무장이나 전술 핵무기 재배치 반대 입장을 밝혔다.
올 한 해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도 남북 관계를 더욱 난관에 빠뜨렸다. 북한과 중국은 정부의 사드 배치 방침에 강하게 반발하며 한국정부를 원색적으로 비판했지만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한국교회는 7월 15일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 공동 명의로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 결정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 발표문에서 사드 배치에 따라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해칠 우려가 있고 민족 화해 분위기가 냉각되며 민생 불안과 한국의 경제적 부담이 커진다는 교회 입장을 천명했다. 교회의 사드 배치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사드 배치는 기정사실처럼 추진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중동과 유럽 분쟁지역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초청해 올해 8월 19~20일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개최한 ‘2016 한반도 평화나눔포럼’은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풀 지혜를 찾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2016 한반도 평화나눔포럼에는 벱싸라 부트로스 라이 추기경(중동 및 안티오키아 마로나이트교회 총대주교), 빙코 풀리치 추기경(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대교구장), 스타니슬라브 호체바르 대주교(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교구장), 프란요 코마리챠 주교(보스니아 반야루카교구장) 등이 참석해 중동과 유럽에서 민족과 종교 분쟁의 아픔을 딛고 용서와 화해를 이룬 값진 경험담을 들려줬다.
서울대교구 민화위는 12월에는 국내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제2차 평화나눔포럼도 열어 남북 화해를 모색하는 노력을 이어갔다.
서울, 수원, 의정부교구 사제단과 남녀수도자들이 11월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 행진을 하고 있다.
■ 인권과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행보
인권과 정의를 향한 한국교회의 행보는 올해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서울 광화문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임마누엘) 농민이 9월 25일 끝내 숨지자 제일 먼저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이 달려갔다. 경찰이 백씨에 대한 부검영장 강제집행을 시도하려 하자 시민들과 함께 막아선 것도 교회였다. 결국 영장 집행은 무산됐고 백씨의 장례미사는 염수정 추기경(서울대교구장)과 김희중 대주교(광주대교구장), 사제단이 서울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공동집전 했다.
한국교회는 진실을 외면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한일 위안부 합의문’에 대해서도 올해 1월 4일 주교회의 정평위 명의로 ‘평화는 정의의 결과입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내고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인권을 경제와 외교논리로 환치했다고 비판했다.
한국교회의 오랜 염원인 사형제 폐지를 위한 노력은 올 한 해 내내 변함없이 계속됐다. 최근에는 12월 14일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사형제도 폐지 세미나가 열렸고 12월 18일에는 춘천교구 사회사목국 대강당에서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생명·평화 이야기 콘서트가 이어졌다.
11월 5일 서울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고 백남기 농민 장례미사.
11월 30일 세계 사형반대의 날을 맞아 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서울광장에서 마련한 조명 퍼포먼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