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르포] 한과로 노년을 새롭게 열어가는 '은빛고소미'
여든의 나이에 새로운 출발… “일하며 삶의 기쁨 느껴요”
은퇴한 뒤 청소·경비 등 여러 일했지만 정년으로 더 할 수 없어
노년에 맞는 일자리 만나… “손주들 줄 간식 만드는 마음으로”
‘은빛고소미’ 어르신들이 자신이 만든 한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정월, 옛 어른들은 세배를 하러 온 이들에게 세찬을 대접하곤 했다.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세뱃돈을 주지만, 세뱃돈이 대중화된 것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다. 설에 차리는 음식인 이 세찬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한과였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새해가 다가오면 사랑하는 손주들을 위해 부지런히 한과를 준비하곤 했다. 음식이 귀했던 시절, 아이들에게 한과처럼 맛있는 음식이 또 없었다. 그렇게 주는 이의 마음도, 받는 이의 마음도 기쁘게 하던 음식이 한과다.
오늘날 손주에게 한과를 만들어 주던 그 마음으로, 노년을 새롭게 열어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교구 사회복지회 산하 시흥시노인종합복지관(관장 안은경)의 한과사업단 ‘은빛고소미’ 어르신들이다.
■ 다시 찾은 노동의 보람
‘펑!’ 소리를 내며 기계에서 과자가 나온다. 과자 테두리를 잘 정돈하고 식히면, 옆에서는 봉지에 차곡차곡 담는다. 봉지에 담긴 과자를 밀봉하고, 상표를 붙여 상자에 담는다. 빠르지는 않지만, 네 사람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하다. 마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듯한 모습에 경쾌함 마저 느껴진다.
일하는 이들의 평균 나이는 81세. 하지만 작업에 임하는 노련한 손놀림은 나이를 잊은 듯 보인다. 한과사업단 ‘은빛고소미’의 작업현장이다.
“즐겁지요. 아침이면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벌써 흥이 나요.”
봉지에 과자를 담던 박영규 할머니(84)가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옆에서 상표를 붙이던 김만기 할아버지(81)도 “이 나이에 움직일 수 있고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면서 “아침에 여기 올 때면 예전처럼 회사에 출근하는 기분이 들어 엄청나게 기운이 난다”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면서 “일을 하고 있어 생기는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다. 이미 십수 년 전에 본래 직업에서 은퇴했고, 은퇴를 하고도 청소 일이며, 경비 일이며 할 수 있는 일자리는 모두 찾아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정년으로 끝내야하는 나이가 됐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구나 생각했을 때 새로운 출발을 만나게 해 준 것이 바로 ‘은빛고소미’다.
사실 ‘은빛고소미’에서 일하는 시간은 하루 4시간. 그나마도 두 팀이 격일로 교대하며 일하기에 월 근로시간 자체가 길지 않아 벌 수 있는 돈이 그리 많지는 않다.
“돈 벌려고 한다기보다는 일하고 싶고, 사람과 만나고 싶어서 하는 거죠. 팔십 먹은 노인이 힘이 드는 일을 하기는 어렵지만, 이 일은 노인들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은빛 고소미’의 근로자들은 한결같이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을 일만하며 살아왔기에 이제는 좀 쉬면서 노후를 보내도 좋겠건만, 이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삶에 활력을 준다고 입을 모았다. 쉼은 그저 무기력함을 줄 뿐이었다.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삶에 이유를 만들어주는 희망이었다.
■ 노인인력활용의 좋은 사례 ‘은빛고소미’
비단 여기서 일하는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게 ‘일’을 찾는 고령인구는 날로 늘어만 가고 있다.
통계청은 2014년 장래인구추계(2015~2065)에서 유소년인구(0~14세) 100명 당 고령인구(65세 이상 인구)를 분석하는 전국 노령화 지수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13년에는 83.3명이었던 전국 노령화 지수는 2017년부터 100명을 넘어선다. 또 2030년에는 193명, 2040년에는 288.6명, 2065년에는 442.3명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 사회가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시기는 2026년경으로,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런 추세의 변화에 따라 노인의 사회참여와 노인인력의 활용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최근에는 사회복지시설 등을 중심으로, 노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은빛고소미’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다. 2013년 시작한 이 사업에는 65세 이상의 노인 10명이 참여하고 있다.
시흥시노인종합복지관 안은경 관장(클라라)은 “‘은빛고소미’ 사업으로 어르신에게는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주민에게는 건강한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어 노인인력활용의 좋은 사례”라면서 “어르신 인력활용을 위한 신규모델을 발굴해 지역 안에서 활기찬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손주 위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마음으로
한과를 만드는 작업 내내 모자, 마스크, 장갑, 앞치마로 무장한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답답하지 않느냐하는 물음에 김만기(81) 할아버지는 “사람이 먹는 음식인데 위생관리가 잘돼야 한다”면서 “정성껏 만든 한과를 누군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이 만든 한과를 손주들에게 주기 위해 사간다는 박영규 할머니는 “늘 손주들 줄 간식 만든다는 마음으로 만들고 있다”면서 “여기 한과는 순 우리 쌀로만 만들어서 누구에게나 마음 놓고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흔히 한과라 하면 기름지고 단 유과나 약과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은빛고소미’의 한과는 흔히 뻥튀기라 부르는 과자다. 다만 일반 뻥튀기와 달리 주름지고 두툼한 형태로 고안돼 식감이 좋다는 평을 얻고 있다. 게다가 색소, 방부제, 화학조미료나 설탕 등을 사용하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무엇보다 쌀을 넣고 기계에서 나온 한과를 다듬고 포장하기까지 이뤄지는 모든 수작업에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정성이 담겼다.
2년째 ‘은빛고소미’에서 일하고 있다는 오일영 할아버지(80)는 “위생과 안전관리를 첫 번째 목표로 생각하고 일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만든 한과가 시흥의 맛을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은빛고소미’는 조금씩 인기를 얻으면서 기존에 일반미로만 생산하던 것을, 지난해부터 현미, 자색고구마쌀 등을 활용해 3가지 맛을 추가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시흥 시내의 도서관, 주민센터, 농업생명기술센터, 장애인복지관 등 10곳에 설치한 무인판매대와 전화주문으로 판매하고 있다. 가격도 1봉에 1000원으로 부담이 없는 편이다.
한과사업단 담당 사회복지사 서문영씨는 “한과수익금은 모두 어르신들의 인건비에 쓰이고 있다”면서 “내년에는 한과 종류를 더 늘리고 어르신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은빛고소미’ 근로자들에게 새해 계획을 물었다. “한과 만드는 거지”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만든 한과를 건넸다. ‘바삭’하고 베어 문 한과에서 어쩐지 어릴 적 할머니가 손에 쥐어주셨던, 그때 그 과자 맛이 나는 듯했다.
※구매문의 070-4759-3252 시흥시노인종합복지관 한과사업단 ‘은빛고소미’
채진석 어르신이 기계에 자색고구마쌀을 붓고 있다.
오일영 어르신이 선물상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