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고 있는 이문우 성인.(탁희성 작)
이문우 성인(요한)은 깊은 효심으로 양모를 봉양하고, 복사로서 선교사로 파견된 신부들을 보필하는 삶을 살았다.
성인은 1810년 경기 이천의 ‘동산밑’이라는 마을의 양반인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5세 때 부모를 여의자, 서울에 사는 한 여교우가 그를 양자로 들여 돌봤다.
양모에 대한 성인의 효심은 지극하기로 평이 나있었다. 실제로 성인은 독신으로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길 원했음에도, 양모의 뜻에 순명해 혼인을 하기도 했다.
성인은 결혼했지만, 아내와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혼인하지 않고 수덕생활을 실천하고 신자들을 도우면서 살아갔다.
특히 성인은 박해로 인해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기 어려운 성직자의 손과 발, 눈과 귀가 됐다. 성 모방 신부를 따라 각 지역을 다니면서는 1년 이상을 복사로서 봉사했다.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 있는 곳을 여러 차례 찾아다니면서 박해상황이나 신자들의 생활과 같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하기도 했다.
박해로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돕기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데에도 힘썼다. 또 다른 신자들과 함께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신을 거둬 장사도 지냈다.
이미 박해자들에게 성인의 이름이 알려져 체포될 위험에 노출돼 있었지만, 성인은 전혀 움츠려들지 않았다. 교회의 일을 돌보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성인은 선교사들의 시신을 수습한 후에 한적한 곳으로 피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신 수습을 마친 성인이 시골로 떠나기 위해 묵고 있던 친구의 집에서 나오던 중 붙잡히고 말았다.
박해를 피해 떠나려던 성인은 갑작스러운 체포에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천주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말한 그는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면서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도청이 끌려간 성인은 심문을 받았지만, 이미 알려진 사실 이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포도대장은 성인이 훌륭한 집안의 양반이라는 것을 알고 술과 음식을 동원해가면서 갖은 회유했지만, 성인의 굳은 결심은 바꿀 수 없었다. 성인은 포장에게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면 만물의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배반해야 할 것이니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면서 “(포도대장이 한 말이) 이미 오래전에 생각한 것이니 더 이상 권하지 말아 달라”고 답했다.
성인은 옥중에서도 양부모와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옥중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모습과 자신의 신앙고백을 남기고, 신자들이 박해로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기를 당부했다. 성인은 1840년 2월 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 성인의 발자취 만날 수 있는 성지
단내성가정성지(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이섭대천로155번길 38 - 13)는 이천에서 태어나 신자인 부모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성인을 현양하는 곳이다. 성지 내, 예수성심상이 세워진 와룡산 정상에 오르면 이문우 성인의 고향을 조망할 수 있다.
※문의 031-633-9531 단내성가정성지 www.dannae.or.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