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당들의 제대 십자가를 보면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형상 뒤로 그저 십자가 하나가 배경으로 서 있는 모양이 많습니다. 잔인하게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기가 거북해지는 시대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보통 어머니를 떠올릴 때는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고생이 떠오르고 그러면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커집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점점 십자가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그 고마움이 의무로 이어지는 부담을 덜려고 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교회는 성황당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 희생으로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흘리셨는데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교회가 태어난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66항 참조). 이 피와 물은 성령이라고 해도 되는데, 그래서 ‘피와 물과 성령은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1요한 5,8 참조). 이 사실이 가톨릭교회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없이는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십자가가 빠지면, 상대를 이용하게 되지 사랑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살아있으면 사랑이 아니라 이용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는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대학 다니는 아이를 가진 부모가 되기 위한 자기사랑에 불과합니다.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는데, 왜 아이들을 부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결국 세상에서 인정받으려는 부모들의 자기사랑으로 인해, 아이들은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엄마가 그렇다면 남편은 자녀를 통한 엄마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희생당하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되고 맙니다. 어떤 누구도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질지라도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배제된 순결한 사랑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광야로 나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교만해지려는 마음과 싸웠고, 육체적 욕망과 싸웠으며, 세상 욕심과도 싸웠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못 박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참 사랑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나타나시어 청할 것이 있다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저함 없이 “저는 ‘고통과 멸시’만을 청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통과 멸시’는 ‘십자가’의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멸시 당하셨습니다. 모세가 성령의 지팡이를 들고 파라오가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서 한 일은 그 성령의 힘으로 파라오와 대결한 것입니다. 파라오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우리 각자가 그 파라오 때문이 이 모든 고통이 오는 것임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파라오는 이렇게 고통당하고 멸시 당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빛이 다가오는 것이 어둠에겐 재앙이듯이, 주님을 받아들임은 우리에겐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고통과 멸시를 찾게 돼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어떤 부활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의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교구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