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 중에는 고국을 떠나 우리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들도 많다. 목숨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선택하다 끝내 순교한 도리 베드로 헨리코 성인도 그런 순교자였다.
사실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를 자주 바치는 이들에게도 ‘성 도리 베드로 헨리코’라는 이름은 조금 낯설다. 호칭기도에서는 ‘김 헨리코’라고도 부르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인 성인의 이름을 성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읽으면 ‘피에르 앙리 도리’다. 다만 한국교회에서는 라틴어를 기준으로 세례명인 피에르(Pierre)는 베드로로, 이름인 앙리(Henri)는 헨리코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 성인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할 당시 한국 성을 ‘김(金)’으로 정했기에 ‘김 헨리코’ 혹은 ‘김 베드로’라고도 부른다.
성인은 1839년 프랑스 뤼송교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란 그는 소신학교를 거쳐 1862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성인의 부모와 본당신부는 그가 선교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었다. 성인이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은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하느님이 제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그분께 순명해야 한다”고 설득해 승낙을 얻었고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인은 서품을 받고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조선으로 출발했다. 이어 홍콩, 요동, 백령도, 충청도 내포 지방을 거쳐, 1865년 5월 경기도 손골 교우촌에 자리를 잡고 우리말을 배우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아직 우리말 공부를 채 마치지 못한 1966년 2월. 성인은 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에 성인은 즉시 곁에서 보필하던 복사를 비롯해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을 모두 손골에서 내보내고 홀로 손골에 남았다. 거센 병인박해의 진행 상황을 전해들은 성인은 손골 역시 박해의 위험에 놓였음을 알아챈 것이다. 성인은 그렇게 같은 해 2월 27일 손골에서 붙잡혔다.
체포되긴 했지만, 프랑스인이었던 성인은 순교 이외의 선택도 할 수 있었다. 관리들이 성인을 문초하면서 그를 프랑스로 돌려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굳이 배교하지 않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성인은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성인에게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명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성인은 27세의 나이로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한 신자는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성인의 모습이 “눈을 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성지
손골성지(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는 성인이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선교활동을 하다 체포된 곳이다. 성지에는 성인의 동상과, 성인의 부모가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십자가 세워진 순교자현양비가 세워져있다.
※문의 031-263-1242 손골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