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예화가 있습니다. 바로 솔개가 40년을 더 살게 되는 방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솔개가 40년을 살아 나이가 들면, 부리가 구부러지고 발톱이 무뎌지며 깃이 무거워져 잘 날 수 없게 되고 먹이도 재빠르게 잡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홀로 산 위로 올라가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서뜨리면 새 날카로운 부리가 다시 자라나는데 그 부리로 발톱을 뽑고 깃털을 다 뽑아내면 강한 발톱과 가벼운 깃털을 가지게 돼 40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솔개는 일 년 정도 더 살다가 죽고 만다고 합니다.
‘항상 쇄신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교회가 항상 쇄신해야 하는 이유는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가만히 놓아두면 죄로 기울게 돼, 끊임없는 쇄신과 변화가 없이는 자연적으로 도태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완전’하기는 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완전’한 인간이기는 할지라도, ‘완성’된 인간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해 완성해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만하면 됐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교회는 어느새 성장을 멈추고 도태되기 시작합니다. 사실 봉사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체장을 10년 넘게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자신이라도 하지 않으면 단체가 사라지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런 모습은 차라리 그런 단체가 사라지는 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물은 흘러야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썩기 때문입니다. 몸에서는 피가 그렇고 사회에서는 돈도 그렇습니다. 단체가 살아야 교회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포가 생기기 위해서는 이전의 세포는 죽어야 하듯이 교회를 위해서라면 우리 단체가 사라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겨야합니다. 교회를 위해 순교하신 수많은 순교자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 피 흘림이 쇄신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고, 나머지 사도들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 두 사도 중에 가리옷 유다가 그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대신할 한 명의 사도를 ‘제비뽑기’로 결정했습니다(사도 1,26 참조).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기 위해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열한 사도는 다른 사도를 뽑기 위해 그저 제비뽑기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한마음이 돼 쇄신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자, 식탁을 돌보는 일을 위해 ‘일곱 부제들’을 선발했습니다. 부제 제도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이 논의해서 새로운 교계제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사도 6,1-7 참조). 이렇게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야 할 것은 새로 생겨나는 마치 세포로 이루어진 몸과 같은 유기적인 모습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도 차차 변화를 두려워해 근 2000년이나 라틴어로만 미사를 고집해 왔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장을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변화는 내가 죽어서 교회가 산다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야 가능합니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세포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 성장을 위한 거름입니다. 내가 살자고 교회의 변화와 성장을 막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교구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