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성지의 김성우 성인 동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은 구산을 교우촌으로 변모시키고, 회장으로서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헌신한 순교자다.
성인은 1795년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 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집안인 구산마을의 경주 김 씨 집안은 양반의 후예였다. 또 지역의 넓은 농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성인은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아왔지만, 천주교 교리를 접한 이후 동생인 만집(萬集)ㆍ문집(文集)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다. 성인의 이름은 우집(禹集)으로 우리가 성인을 부를 때 쓰는 ‘성우’는 성인의 자(字)다.
성인은 성품이 정직하고 아량이 커서 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학식이 풍부하고 인품도 온후한 성인의 선교는 성인의 가족과 친척을 비롯해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성인과 형제들의 노력으로 구산마을은 교우촌으로 변화했다.
1834년 중국에서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성인은 바로 그해 유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또 더 자주 성사를 받고, 더 많은 교회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자주 서울을 오갔다. 1836년에는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했다.
모방 신부에게 구산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된 성인은, 자신의 능력과 타고난 성품을 다해 부지런히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전교에 매진했다. 신자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교회력인 ‘첨례표’를 나눠주며 기도생활에 힘쓰도록 권면했다. 또 임종을 앞둔 이들에게는 대세를 주고, 신부가 방문했을 때는 복사로서 신부를 보호하고 보필했다. 그의 덕행은 외교인들에게도 모범이 됐다.
하지만 적극적인 신앙실천을 보여온 만큼, 1839년 기해박해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성인은 사학의 괴수로 지목돼 한양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비록 성인의 몸은 옥에 갇혔지만, 그 신앙은 무엇으로도 구속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은 여러 해에 걸친 가뭄으로 처형을 중단해, 성인의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은 무려 15개월이나 지속됐다. 성인은 옥중에서도 마치 자신의 집인 듯 행동했고, 함께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해 2명을 입교시키기도 했다.
배교하라는 끊임없는 강요에도 굽히지 않고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고 신앙을 증거했다. 성인은 마지막까지도 배교 강요를 거부하고 심한 태형을 받은 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성인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41년 4월 29일이었다.
지난해 4월 구산성지에서 봉헌된 김성우 성인 순교 175주년 현양미사 모습.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성지
구산성지(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북로 99)는 김성우 성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자, 성인의 선교로 교우촌으로 변모한 곳이다. 성지에는 성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문의 031-792-8540 구산성지 www.gusansungji.or.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