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목마름을 토로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기도가 어떻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이나 다른 민족 사람들을 닮지 말라고 먼저 운을 떼신다. 유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율사들의 기도하는 모습에서도 당시의 종교 문화적 풍경이 그려진다. 예수님은 이 그림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으라고 하시듯 단순하면서도 주의를 끄는 하나의 빛을 던지신다. 구하기도 전에 필요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숨은 일도 보아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확신을 전제하신다.(마태 6, 5~8참조)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냉정하고 비판적인 눈이 아니라 다정스런 아버지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아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장황한 말로 우리의 요구를 알릴 필요가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해서 우리의 기도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갈림 없는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의 가난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바람조차 겸손히 의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풍부하고 고귀한 은총의 선물로 남아 있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이끌어주신다.(마태6,9-15참조)
떼르뚤리아노 성인은 ‘주님의 기도’를 ‘복음 전체의 요약’(breviarium totius evangelii)이라 일컬었다. 이 기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물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 고유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기도를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바칠 수 있는지 체험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그분의 정신을 따라 바치도록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일상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부활의 영성으로 가는 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모세처럼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없이도 우리는 그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나를 존재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 알듯이, 하느님 체험은 예수님의 일상과 그분의 행적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함에 열려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육화이신 그리스도를 안에서 체험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면을 통한 이 나눔은 결국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성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다시금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마음을 읽다보면 그분께는 세상에 실존하신 순간부터 부활의 삶 안에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신앙인의 생활이 부활의 영성으로 점철되는 이유이다.
예수님께는 수난과 십자가 이전의 공생활이 부활의 삶이셨고, 또한 부활의 빛으로 교회 안에서 현존하신다. 작금처럼 혼잡한 사회문화의 조류가 심할수록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를 깊이 묵상하고 관상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필요하다. 자신의 내면과 삶의 주변을 사랑과 존중으로 바라보는 영혼의 시선이 충만할 때 영성생활이 정리되고 부활체험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