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외적 박해의 위협과 함께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사상들을 단속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사상들로는 영지주의, 마르치온 이단, 몬타니즘을 꼽을 수 있다.
영지주의의 발생배경
「지식」이란 뜻을 가진 희랍어 「그노시스」 (gnosis)는 이단적 문헌들에서 특수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오는 구원에 관한 지식 즉 「영지」(靈知)를 말하며, 이에 속한 이단사상을 「영지주의」(gnosticism)라 부른다. 영지주의의 생성과정과 역사를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기원전 4세기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원정하여 대제국을 세운 이후, 헬레니즘 문화는 동, 서양의 사상을 조화하여 찬란히 꽃피웠다. 희랍 철학에 기원을 둔 영지주의 사상은 동방의 종교들의 이원론(二元論)을 흡수하여 독특한 구원론을 전개시켰다. 영지주의는 여러 가지 종교와 다양한 철학에서 요소들을 끌어들여 혼합적인 사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플라톤 철학의 신과 인간의 중개사상, 피타고라스 철학의 자연 신비사상, 스토아 철학의 개인의 가치와 윤리성의 의미가 복합되어 있으며, 여기에 희랍신화, 유대교, 페르시아 종교 등의 요소가 두루 가미되어 있다. 신약성서 특히 요한복음과 바오로 서간들 안에 이원론적 언급이 있고, 한편으로 영지주의의 그릇된 교설을 경계하는 구절들도 있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에는 영지주의가 하나의 사상운동 차원에 머물러 있었지만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교회 안에서 조직화되면서 신자들에게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영지주의의 핵심내용
영지주의의 분파가 많고, 그 교설들이 서로 다르며 복잡하기 때문에 이를 명확히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영지주의 파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발렌티노와 바실리데파의 설을 토대로 서로 공통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소개함으로써 영지주의의 일반적인 성격을 찾아보도록 하자. 영지주의는 이원론(二元輪)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음양사상을 조화적인 이원론이라 한다면,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철저히 대립적인 이원론이다. 선과 악, 영(靈)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영과 육 등은 서로 존재론적으로 대립의 관계에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신은 영의 세계만 관할하고 물질의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이다. 그들은 영의 세계를 어떠한 물질적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함」(플레로마)의 세계라 부른다. 인간의 육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물질은 나쁜 것이며, 데미올구스(Demiurgus)라 하는 사악한 창조신이 이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한편 인간 안에는 「신적 섬광」(神的 閃光)이 있는데, 이 신적 섬광은 원래 영의 세계의 요소이며,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 안에만 있다고 한다. 이 신적 섬광이 어떻게 일부 사람들 안에 있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방법이 영지주의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천상 세계의 하위 「신」(혹은 「에온」)인 「소피아」가 죄를 지어 물질의 세계로 쫓겨나서 육체 안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상 영적세계에 속하는 그리스도가 물질세계에 내려와서 「신적 섬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몰래 그 비밀을 깨우쳐줌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이 비밀이 바로 「영지」인 것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신적 섬광」을 지니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에게 국한된다는 점에서 선민적 운명론이며, 「영지」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될 수 없는 비밀이라는 점에서 밀교적(密敎的)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영이 육신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논리에 따라, 인간 육신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는 태도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극단적인 금욕주의로서 일체의 육식과 결혼을 금한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로 육신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을 해도 상관없다는 윤리적 방탕주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순교나 금욕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현설
천상의 그리스도가 영지를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을 때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나타났는가? 영지주의자들은 인간 육신 안에 감금되어 있는 「신적 섬광」을 해방시키러 온 그리스도가 절대로 육신을 취할 수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허깨비 또는 환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가현설」이라 부른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처형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로마 군사가 지나가던 치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일이 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이때 진짜 그리스도는 빠져나가고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서 처형당했다고 설명한다.
이 가현설은, 인간 육신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그들의 노력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육화(肉化)의 신비를 부인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내용에 좀 더 접근하려는 영지주의파들 중에 발렌티노파에서는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나셨지만 마치 통속을 지나오듯 마리아를 거쳐 왔을 뿐이지 육신을 취하신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가 하면, 아펠레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 외계의 별에서 온 육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며 인간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도 부인한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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