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반세기 넘게 헌신하다 오는 3월 15일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는 메리놀 외방선교회 백영제 신부(오른쪽)와 서충열 신부가 환하게 웃어 보이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성령이 보내시는 길인데 어디를 가든지 기쁘지요. 올 때도 그랬고, 이제 갈 준비를 하면서도 기쁩니다. 하하하.”
60년 그리고 50년, 낯선 땅에서 평생을 바친 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감회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선교사의 삶이다.
오는 3월 15일,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는 메리놀 외방선교회 백영제(제라르도, Gerald J. Farrell, 93) 신부와 서충열(요셉, Joseph A. Slaby, 84) 신부. 한국을 떠나는 것이 서운할 법도 하지만, 감회를 묻는 말에 그저 “기쁘다”고만 답한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나이는 꽤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신부의 몸과 마음에는 생기가 넘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끌어 주시니”(시편 23, 3), 그런 듯도 하다.
“사진이요? 한 장도 없는데요…. 어쩌지요?”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니 뒤를 돌아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백 신부는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남은 사진 한 장도 없다고 말한다.
“지나간 시간과 장소, 사람에 대해서 그리 마음 쓸 것도 미련 둘 것도 없지요. 앞으로 해야 할 일, 나아갈 길에 대해서 마음을 쓰다 보니 사진을 잘 찍지도, 찍어 둔 사진들을 챙기지도 못했네요.”
■ 오직 하느님을 중심에
백 신부가 한국에 온 것이 1957년이니, 햇수로 딱 60년이다. 서 신부는 9년 뒤인 1966년에 도착했다. 51년째이다. 두 신부 모두 33세 때 한국에 왔다. 같은 나이에 한국에 왔고, 많은 곳에서 함께했다. 어느 곳이든 모두 신자들의 사목, 특히 내적 삶을 돌보는 자리였다. 50년, 60년을 한결같이 두 노신부는 오직 하느님 양떼의 기도와 영성 생활에 힘을 기울였다.
두 신부는 이러저러한 공통점이 꽤 많았다. 같은 나이에 한국에 온 것, 한국말 배우기를 어려워한 것도 닮았고, 항상 기뻐하는 것도 똑같다. 심지어 사제성소에 대해 부친이 반대한 것도 닮았다.
백 신부는 의대를 졸업하고, 해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성소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머리 좋고 건강하고 허우대도 멀쩡한 엘리트 군의관의 앞길은 꽤 밝았다. 부친은 그런 아들을 당신의 보람으로 자랑스러워했다.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입회하고서도, 차마 아버님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여전히 의사를 하고 있는 줄 알고 계셨지요.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더 감추지 못하고 말씀을 드린 후, 몇 년 동안 부친은 아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아들은 기도하고 기도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서품식 전날, 아버지는 마음을 바꿨다.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수 년 동안의 침묵은 깨졌고, 하느님의 은총이 저와 아버지에게 내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서품식에 참례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거지요.”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을 하다가 입회한 서 신부도 같은 경험을 갖고 있다.
“아버지께서 개신교 신자였거든요. 엄청 반대하셨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이해해주셨고, 고국을 떠날 당시만 해도 아주 낯설었던 한국으로 간다고 해도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여주셨어요.”
백 신부는 1925년 10월 5일 미국 뉴욕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은 청주교구 영동본당에서의 보좌신부 생활로 시작됐다. 다시 몇몇 본당 보좌를 거친 뒤, 아름다운 속리산을 곁에 둔 보은본당에서 6년 동안 주임 신부로 사목했다. 어려운 살림에 새 성당을 건축하느라 애도 먹었지만, 백 신부는 당시를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들로 돌아본다.
성당을 건축하고 1년 뒤인 1967년, 의료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예수수도회에서 의료시설을 마련했다.
“병이 나면 대전이나 청주로 나가야 했지요. 수녀님들이 본당에 와서 성모의원을 세웠어요. 나중에는 좀 더 시설을 확충해서 병원이 됐고요. 27년 동안 가난한 지역 주민들을 위해 봉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기억하는 가장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인근에 병원들이 많이 생기면서, 성모병원은 1993년 문을 닫았다.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서 신부는 망설이지도 않고 ‘한국말 배우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 신부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한국말을 ‘쥐꼬리’만큼 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그렇다.
1934년 10월 13일 미국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난 서 신부는 형과 누나 둘을 둔 막내였다. 백령도본당 등 인천교구와 영주본당 등 부산교구에서 보좌와 주임으로 사목활동을 했다.
약간의 영적 결벽증으로 인한 우울증 증세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만큼 서 신부는 사제로서, 선교사로서 철저하고 엄하게 스스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로마 안젤리쿰대학교에서 1년 동안 짧은 기간이나마 가톨릭 영성을 공부하고 돌아온 것은 기도와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두 신부는 사목과 기도, 영성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더불어 오직 하느님을 하느님 백성의 중심에 모시고자 하는 노력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개인의 생활과 삶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오래 입어 해지기 시작한 속옷들, 한 땀 한 땀 기워 입다 보니 어떤 것은 기운 데가 50군데나 된다. 기운 자국으로 새로 만들어진 옷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옷감이 삭아버릴 만도 한데, 그것도 워낙 관리를 잘해서 아직도 쓸 만하단다. 어떤 속옷은 무려 70년대 것이라고 한다. 신부님들을 도우며 일하는 직원들이 새 속옷이라도 선물하면, 그건 영락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고 만다.
■ 기도와 영성지도에 집중
1970년대 초중반 이후, 두 신부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기도와 영성 지도에 집중된다. 특히 백 신부는 ‘성령 쇄신 운동’과 ‘지속적인 성체 조배 운동’을 한국교회에 처음 소개하고 활성화시킨 주인공이다. ‘마리아사제운동’이 한국에서 시작된 후로는 이에도 적극 참여했다. 서 신부는 항상 백 신부와 이러한 기도와 영성 운동에 동참했다.
백 신부는 미국에서 시작된 성령 쇄신 운동을 1973년 한국에 소개했다. 1971년 미국에 휴가차 갔다가 가톨릭 성령 쇄신 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백 신부는 1973년 가을, 신학교에서 성령 세미나를 실시하고, 이듬해 1월엔 한국 평신도들을 위한 첫 세미나를 실시했다. 이후 세미나에 참석했던 평신도들에 의해 성령 쇄신 운동이 빠르게 전파됐다.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기간 중에도 ‘오 주님, 새로운 성령 강림과도 같이 당신의 놀라우신 일들을 오늘날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새로운 성령 강림은 하느님의 뜻이고, 우리는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백 신부의 말이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편견도 많았다고 한다. 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개신교 냄새’가 난다고 해서 신부님들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사제들이 참회해야 한다’면서 관심을 보여주셨고, 나중에는 신부님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백 신부는 “사실 성령 쇄신 운동을 하다보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공경하게 되고, 내 마음에 예수님이 임하시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며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성경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백 신부는 이어, 1980년 미국에서 시작된 ‘지속적인 성체 조배 운동’을 한국에 소개했다. 1983년 11월 22일, 당시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가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소개하면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듬해인 1984년 6월 1일, 백 신부와 서 신부가 파견되면서 인천교구 부평2동성당에서 처음으로 조배회가 시작됐다. ‘가르멜산 성체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지만, 1991년 교황청이 ‘지속적인 성체조배회’라는 명칭으로 국제 공립 단체를 설립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백 신부와 서 신부는, 1978년 하안토니오 몬시뇰이 10여 명의 사제들과 함께 모여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된 ‘마리아 사제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다락방 기도 모임’은 마리아 사제운동의 고유 활동, 또는 회합을 의미한다.
13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 해온 영성 공부도 있다. 10여 명의 성직ㆍ수도자들이 모여 ‘하느님의 뜻 영성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시복 추진 중인 이탈리아의 루이사 피카레타의 영성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한국의 신자 분들에게 꼭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특히 성령 쇄신, 지속적인 성체 조배, 다락방 기도에 열심하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백 신부는 되풀이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신자들의 기도와 영성생활을 돕는 단짝이었던 서 신부 역시 현대인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하라고 권한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바빠요. 혼자 있는 시간에도 스마트폰과 죽고 못 떨어집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들도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입니다. 한국 신자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두 노신부는 미국 귀국 후 뉴욕에 있는 메리놀 외방선교회에서 생활한다. 평생 자신들이 몸 바쳐 돌본 한국의 신자들과는 기도 안에서 만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