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면 부모로부터 이름을 받는다. 언어로서의 소리 중에 각자의 이름만큼 분명한 음성이 또 있을까 싶다. 세례성사로 주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은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세례명을 받았다. 신앙인은 세속의 이름보다도 자신의 세례명이 호칭될 때 스스로의 통합적인 정체성을 느낀다.
놀랍게도 모세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당신의 신원을 알리시는 하느님과 대면한다. 더할 수 없는 이 완전함을 인간이 담아낼 수 없음에도 복음서는 ‘아빠! 아버지!’(마르 14,36)하며 하느님과 일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깊게 전한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히 부르짖는 예수님 기도의 정점에서 하느님을 본다.
사람이 상대방을 소리내어 부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매우 절박한 상황을 내포하기도 한다. 인간의 죄 안으로 육화되시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늘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을 먼저 계시하고 계심을 아셨다.
이에 그리스도인도 하느님께서 먼저 가까이 오시므로 그분께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다.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예수님처럼 그분을 믿고 고백하는 특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되었음을 통감하게 된다.
하늘에 계시다는 은유적 표현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초월하여 계심을 증언하신다. 이는 세상을 하느님의 일부로 치부할 수 없고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 또한 그분께 대한 경외심을 손상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피조물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창조적 차원에서 관상하시며 내면으로부터 아버지 곁에 계셨다. 그렇게 세상 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와 함께 머무르셨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시는 예수님의 찬양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당신에게서도 성취되기를 기도하시는 것이라고 성 치프리아노는 말한다. 이는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께서 거룩해지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삶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는’(시편 34,19) 구원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들 또한 하늘에 있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 안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자녀를 기다리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참조)이시다. 그러기에 순박한 어린이와도 같은(마르 10,14 참조) 우러나는 찬미와 겸허한 공경은 하느님께 이른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언제나 깊이 인식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 또한 우리의 영이 거룩해지는 일로 압축된다. 이 지속적인 인간의 영적 성숙은 당신의 완전성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늘 깨어있음으로 가능하다.(마태 5,48 참조)
단, 이 초대에 대하여 아주 특별한 기도수련을 해야만 한다거나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만 성취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의 인성이 당신께 이르기 전에 이미 임마누엘 주님을 통하여 우리의 일상에 자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현존체험은 증대된다. 사실 신앙인은 세상 안에 그렇게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이에 응답하는 영성생활은 생동감이 넘친다. 삶의 순간순간에 “오, 하느님 아버지!”하고 부르는 신앙인이 되자. 제자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1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