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극가(스테파노) 성인은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던 기해박해 순교 성인이다.
성인은 온화한 성격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양반의 후예였다. 부친, 형제들과 함께 입교한 그는 교리를 공공연하게 실천하면서 살았다.
신자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주변의 권유와 부친의 의견에 따라 재혼한 성인은 수원 갓등이(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그 생활도 길지 않았고 6~7년 후 새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성인은 이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격려하고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선사업과 전교활동을 펼쳐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생계는 서울·인천·수원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책을 베끼는 일을 해 꾸려나갔다. 그 가운데에서도 성인은 신심서적을 필사해 신자들에게 보급했다.
성인의 신앙생활이 신자들의 모범이 되자, 선교사들은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했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 양간의 교회 전답을 경작·관리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회장이 된 성인은 이웃 고을인 양지의 은이를 오가며 전교했다.
성인은 전교하면서 천주가사 중 ‘삼세대의’(三世大義)를 짓기도 했다. 신자들이 삼세(천당, 지옥, 십계(현세))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내세에 천당에 갈 수 있도록 현세에서 교리를 실천하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하는 내용을 담은 가사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선교사들이 체포됐지만, 성인은 두려움 없이 전교에 힘썼다. 그러나 기해박해가 끝날 무렵 성인이 경작하던 전답을 빼앗으려는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됐다.
체포된 후 “종교를 버리겠다고 하면 즉시 놓아주겠다”는 포장의 회유에도, 성인은 “만약 나를 놓아준다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교해 회두시키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포장은 성이 나 더욱 혹한 고문과 형벌을 내렸지만, 성인의 신앙은 꺾일 줄 몰랐다.
성인은 형벌로 입은 상처로 신음하면서도 배교자를 꾸짖고, 가족과 목숨을 걱정하는 신자들을 격려했다. 이런 성인의 권면은 옥중에서 김절벽(도미니코), 이사영(고스마) 등을 포함한 여러 배교자들을 회개시켰다.
성인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형벌을 받다가, 1840년 1월 30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성경필사 중인 민극가 성인(탁희성 작).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요당리성지·왕림성당·은이성지
성인이 활동한 교우촌 양간공소 자리인 요당리성지 순교자묘역에는 성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갓등이에 자리한 왕림성당(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1길 71)과 은이성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도 성인이 전교활동을 펼치던 곳이다.
※문의 031-353-9725 요당리성지, 031-338-1702 은이성지, 031-227-6678 왕림성당
요당리성지 전경.
민극가 성인의 묘.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