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매질로 피투성이가 된 성녀 이 아가타.(탁희성 작)
이 아가타 성녀는 삶을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모진 고문 속에서도 한결 같은 믿음을 보인 순교자다.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를 보면 ‘이 아가타’라는 성녀가 3위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습상 여성의 이름은 잘 명기하지 않아, 여성 순교자들의 이름은 성과 세례명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아가타 성녀 외에도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아, 성과 세례명만으로 기억되고 있는 여성 순교자들이 많다.
1784년 경기도 이천의 구월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이 아가타는 이호영(베드로) 성인의 누나다. 다른 이 아가타 성녀들과 구분해 이조이 혹은 이소사(召史)라고 널리 불리는 성녀다. 조이, 소사(召史)는 과부를 점잖게 이르는 말로 주로 성에 붙여 쓰는 표현이다.
성녀는 17세에 출가했지만 3년간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고 남편을 잃었다. 이후 성녀는 친정으로 돌아와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키워갔다. 성녀는 늘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자세로 살아, 사람들은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기리고 이런 성녀의 모습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성녀는 부친이 선종하고 가세가 기울자 삯바느질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가며, 노모와 어린 동생을 돌봤다. 궁핍 속에 살았지만, 성녀는 언제나 안색을 평화롭게 하고 말과 행실을 선하게 하며 동생과 함께 교리를 실천했다. 이런 남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신앙생활이 널리 알려진 만큼, 박해의 칼날도 빨리 찾아왔다. 1835년 2월,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졸들은 가장 먼저 체포 대상에 오른 성녀의 집에 들이닥쳤다. 성녀는 동생과 함께 배교를 강요 당했지만 한결같이 “천주를 배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성녀를 향한 고문은 극심했다. 주뢰형과 지독한 매질로 인해 성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투성이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포졸들은 매질 후엔 성녀의 옷을 벗겨 높이 매달아, 능욕을 당하게 했다. 하지만 성녀의 입에서는 오직 “배주(背主)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대답만 나올 뿐이었다.
동생은 모진 고문에 기력을 잃고 옥중에서 6개월 먼저 순교했다.
기록에 따르면 성녀는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서도 여전히 온화한 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사형이 집행되자 성녀는 성호를 긋고 조용히 칼을 받았다. 이때 성녀의 나이 56세였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단내성가정성지
단내성가정성지(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이섭대천로155번길38–13)는 이천에서 태어난 성녀를 현양하는 곳으로, 성녀의 삶과 신앙을 묵상할 수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