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완성시키는 분이시기에 당신의 다스리심은 세상 안에서 드러나야만 한다. 그리고 제자는 종말론적인 아버지의 나라를 고대하는 세상의 순례자다. 현세의 교회공동체와 개별 신앙인들 각자도 제자로서 세상 안에서 펼치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품위와 공동체가 생명으로 약동하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동고동락하시며 열정을 다하신 이유다.
세상이 뿜어내야 할 의로움과 평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친교와 상생의 가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6,33) 하신 예수님의 절박함에서 짙게 묻어난다.
오래 전 ‘아버지의 나라’로 떠나신 은사 신부님의 훈화가 생각난다. 당신을 폭탄공장 공장장, 사랑의 원자폭탄을 만드는 공장장이라 하셨었다. 신학생들이 비둘기같이 양순해 보여도 가슴에는 사랑의 폭탄을 품고 사는 사랑의 혁명가로 양성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학교는 전공과 양성뿐만 아니라 모든 교육을 통틀어 세상을 개혁할 혁명가 양성소요, 이 나라와 민족에 일조할 혁명가를 길러내는 정신개혁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명에 충실한 사제는 당연지사 애국자임도 강조하셨다. 혹자들은 폭탄 생산은 좋지만 불발탄이나 오발탄은 어찌 하느냐고 염려한다. 실천보다 말을 앞세우는 불발탄도, 엉뚱한 곳에 열정을 쏟는 오발탄도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그래도 사랑의 폭탄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야 없지 않느냐는 말씀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자. 배타적 거대 경제주의와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자비 속에 개인적·공동체적 고통의 배가로 상생의 문화가 표류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용기를 내어 이런 현실의 전환을 지향하며 하느님 나라를 꿈꾼다. 세상이 쏟아내는 파괴와 상실의 아픔에 맞서 희망을 잃지 않고 치유자로서의 복음생활을 계속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세상의 장대함과 아름다움도 그대로 꿰뚫어 보아야 한다. 신앙은 이러한 기도와 실천에 의해 성장한다.
이것이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드려야 할 기도의 범위다. 그 힘의 원천은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육화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에페4,9)
은사 신부님과 그분의 영성에 대한 존경은 사제직에 몸담고 있는 현재의 나 자신을 환기시킨다. 사랑의 폭탄을 만들고자 함은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나라가 임하기를’, 이 땅에 사랑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이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22,20) 하는 희망가처럼 이를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가 먼저 자신 안에서부터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의 영혼 안에서 다스리시며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 나라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과 삶의 주변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뤄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제자의 영은 헛된 욕심과 명예로부터 해방되어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용과 평화와 의로움의 태도와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길을 열어간다. 그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각자가 한 사람의 성실한 제자인 이상 그 나라의 완성은 자신과 세상 안에서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