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신부도 아닌데 어쩌다 혼인미사 주례를 하게되었습니다. 강론중에 새 가정을 이루는 신랑 신부에게 장차 요셉,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모범적인 성가정을 이루며 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미사가 끝난후에 어떤 분이 어떤 가정이 성가정인가를 물었습니다. 나는「가족 모두가 성인이 되면 성가정이지」하고 얼버무려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며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내가 아는 가정들을 꼽아가며 어느 가정이 성가정인지 가려내 보려니까 한 가정도 없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성가정에 대한 내 기준이 잘못되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요셉 같은 분, 아들은 예수 같은 분을 찾아보려니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가정이 성가정입니까? 가족 모두가 성인들로 구성되면 성가정입니까?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너무 막연하고 비현실적입니다.
가정은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단위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가족이 모두 성인이라서 성가정이라기 보다 가족관계가 거룩해야 성가정이라 생각됩니다. 관계가 거룩하다는 것은 그 관계 때문에 자기는 희생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요셉은 그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 예수를 길렀습니다. 신앙 때문에 실제로는 장가도 못간 셈입니다. 마리아가 동정이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자기의 일생으로 치면 마리아와 예수를 위해서 인생을 망친 꼴입니다.
마리아는 또 어떻습니까?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요셉에게 참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생을 망친 꼴이 마리아도 요셉과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 이 부부는 이 땅에 구원자를 위탁받아 낳고 기르느라고 자신들은 희생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소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희생의 깊이가 깊은 만큼 그 만큼 거룩함의 높이도 높습니다. 성가정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타당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희생이란 말이 요즘처럼 빛을 발해야 할 시기도 없을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행위도 공허해 보입니다. 본시 반지에는 인감도장이 함께 있어서 반지를 주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위임하는 뜻이라야 하는데 결혼을 하면서도 자기의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일단 유사시를 대비 하겠다는 생각이 남아있고 그런 맘이 있는 한 자기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느니 하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수 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둘만 낳아 잘 키워보겠다고는 했지만 적게낳은 마음속에는, 자녀를 많이 낳아 그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고생하며 희생되고 싶지도 않고 나도 내 삶을 내 나름대로 즐기고 편히 살고 싶어서 적게 낳은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한 어찌 자녀와의 관계가 성스러울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들이 말은 않지만 더 이상 동생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를 압니다. 즉 자식을 위해서 전부를 희생 할 수는 없다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자기 어머니가 왜 병원에 갔다 왔는지를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희 둘만 키우기도 힘들다는 말을 쉽게 들어 왔습니다. 자녀 때문에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않고 희생되고 싶지않은 마음은 잉태된 동생도 병원에다 버릴만큼 강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포기한 부모를 만난 예수였기에 예수 자신도 이 세상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놓을수 있었다고 봅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며 점점 이기적으로 변화되어가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희생이란 단어의 가치를 새삼 아쉬어 합니다.
성가정은 자기 가정만을 위한 성가정이 아님을 잘보여 줍니다. 성가정 또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희생된 가정입니다. 아들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예수는 다 키워놓고 보니까 나이 들어도 장가들어 손주 안겨 줄 생각은 않고 한번 집을 나가면 며칠씩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들 모아놓고 설교라는 걸 한다고 해서 한번은 찾아 갔더니 홀대를 해보냈습니다.
하긴 어릴때부터 끼가 있어서 오늘 복음 성서에서는 12살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잃어버리고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 부모는 놀랍고 반가와『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고 말하자 예수느『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눈에는 천하 불효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정이 성가정이었습니다. 가정도 자기 가족들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둔 십자가는 장식품도 아니고 집지켜주는 부적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걸어 두었다고 성가정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볼때마다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고 이를 위해서는 내 자신이 가정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ㆍ가정간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관계가 헌신을 통해서 거룩해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는 곧 우리 가정을 하느님께로 향한 개방으로 안내하여 성가정을 이루어 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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