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그러나 선물꾸러미가 가득찬 들뜬 연말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웃들은 이시기가 기쁘기 보다 쓸쓸하고 춥기만 하다. 더욱이 검은 산, 검은 물, 검은 거리가 어린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원도 태백지역 탄광촌의 불우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속에서 외로움과 허전함에 떨고 있다. 성탄ㆍ연말을 맞아 부모와 가정으로 부터 버려진채 아픈 가슴을 보듬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북ㆍ고한 탄광촌 어린이들의 마음에도 그리스도의 참기쁨이 전해지길 기대하며 이 어린이들의 애달픈 삶의 현장을 찾아 보았다.
청량리에서 태백선을 타고 원주ㆍ제천ㆍ영월을 지나 4시간여를 달려가면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는 사북ㆍ고한 탄광지역.
고한역 주변에 널려있는 저탄장의 탄더미와 검고 높은 방진망에서는 연신 매캐한 가루가 뿜어져 나와 호흡장애를 일으키게 하고 멀리 보이는 산기슭에는 새카만 집들이 스산한 겨울날씨와 함께 광산촌 특유의 냄새를 풍긴다. 「플플」거리며 피어오르는 검은 먼지를 헤집고 늘어선 거리는 사양(斜陽)길로 접어든 광산촌의 서글픔을 대변이나 하듯 표정이 없다.
모두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인 늦은 오전, 고한역 저탄장 근처를 맴도는 국민학교 1학년생 종오의 얼굴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요? 집에 없어요. 나갔어요. 나랑 아버지랑 살아요』
집에 엄마가 없는 것이 당연하기나 한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꾸하는 종오의 말이다. 종오와 같이 이곳 사북ㆍ고한 탄광촌에 살고 있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집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숨기고 싶은 만큼 커다란 비밀도 아니며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동네곳곳에 퍼져있는 오락실이 나 만화가게. 새로운 막장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버려두고 간 빈 집에 가면 언제든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있는 결손가정 아이들의 무리를 쉽게 만날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들 불우 결손가정 소년소녀 가장의 수는 엄청나다. 고한읍에 자리잡고 있는 G국민학교의 경우 1천6백여명의 아이들중 60여명이 결손가정 아이들이라는 통계는 문제의 심각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밖에 파악되지 않은 아이들의 수는 얼마나 될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하며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돌이 지나기도 전에 엄마가 가출, 아버지마저 도시로 떠나 칠순이 다 된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부모의 따뜻한 정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정남이는 어젯밤 또 친구들과 어울려「본부」에서 새우잠을 잤다. 외로움과 상처를 갖고 있는 아이들끼리 동네 어른들의 시선이 닿지않는 건물 한귀통이에 그들만의 세계를 담아놓은곳, 여기가 바로 아이들이 얘기하는 본부다. 하루종일 거리를 헤매던 아이들이 밤이 되면 잠을 자기위해 모여드는 본부는 이동네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결손가정 아이들은 이곳에서 편안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낀다.
가끔씩 이곳 아이들이 거리를 헤매다 집에 돌아가는 날이면 아이들의 아버지는 애들 엄마에게 버림받은 절망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찌검을 해온다.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할 나이가 안된 아이들은 몸에 가해지는 손찌검의 고통이 무섭고 싫다. 차라리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거리를 헤매는 것이 휠씬 낫다.
형편이 어렵더라도 조부모나 친지들이 돌봐줄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허락되지 않은 결손가정 아이들은 주변인의 신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결국 가난하기 때문에 다시 또 가난해야 하는 현실의 모순앞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른들처럼 아이들이 갖고 있는 환경은 매일 이들앞에서 악순환의 고리로 반복되며 나타난다.
그리고 가정 역할까지 해야하는 이들에게 학교는 또 하나의 낯선 세계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교육의 부재로 인해 정서나 지적인 면에서 뒤지고 불안정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생횔의 불규칙과 빈곤은 이들에게 습관적인 결식의 설음까지 안겨주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병환을 돌봐 드렸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나는 굶어도 아버지 밥은 해드렸다. 그러나 그때 나는 배고 고팠다. 그런 것을 나는 참았다 … 』
국어를 제일 좋아하는 일용이의 일기는 이곳 아이들의 아픔을 잘 말해준다.
이들은 남들보다 더 달라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며 자기만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칠 줄도 모르는데 왜 이토록 고난의 삶이 그치질 않는지 알수가 없다.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살기위해「인생막장」을 찾아 모여든 탄광촌의 어른들은 아침마다 늘어나는 결손가정 아이들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저리고 세상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들의 힘만으로는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단순히 아이들의 문제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조적 가난의 악순환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가정안에서의 갈등 특히 사양길로 접어 든 광산업계에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새로운 불안으로 떠오른 폐광에 대한 위기감, 이러한 생존에 따른 문제들이 가정문제와 함께 해결되지 않는 한 결손가정 아이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며 이들의 문제가 사회의 아픈 상처로 남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에 따라 원주교구에서는 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사북과 황지에 대철 베드로의 집과 대건의 집등 시설을 마련해 결손가정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서울대교구 서초동본당의 소년소녀가장돕기회나 대치동본당의 작은 맘 모임회 등 본당 차원이나 신자들 나름대로 후원회를 결성,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지만 이들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을 느낄 뿐이다.
또한 사회 일반인들의 인식도 대개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이들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들을 돕기위한 구체적인 활동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처럼 미약하나마 이들에 대한 복지와 시설 마련에 교회가 적극 나서고 있기는 하나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담당자들은 시설에서의 수용차원을 넘어선 가정의 따뜻함을 전해주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지역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정서함양을 위한 문화공간설치를 위해 재정과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문제해결을 위한 시급한 과제이며 이웃과 사회의 애정어린 관심은 물론 종교단체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참여와 협조가 요구되고 있다.
원주교구 사회선교국의 지원을 받아 태백지역 사북고 한 탄광촌 사회복지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이수자 수녀(성모 카테키스타회)는『불우 결손가정 아이들의 문제는 가정과 연결돼 있어 더욱 조심스러운 부분이며 이 점 때문에 이곳에서의 복지활동은 아이들과 가정을 하나로 보고 종합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많은 사람들이 탄광촌이라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어두운 일도 많이 있지만 희망적이고 밝은 일면들이 더 많다』며 오히려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아이들에게서 배운다고 말한다. 『식당에서 거스름돈을 건네 주는 아주머니의 손끝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손끝도 탄가루로 뒤덮힌 거리만큼이나 새카많지만 나름대로 삶을 극복하며 어려움과 고통을 남과 함께 나눌줄 아는 소박함을 발견할 때 보람을 느낀다』는 이수녀는『경제적인 여건만 허락된다면 아버지가 하루 3교대의 고된 작업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엄마가 가출한 집의 아이들이 모여 마음놓고 공부도하며 지낼수 있도록 공부방을 마련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또한 사북본당 주임이면서 대철 베드로의 집 원장인 감한기 신부는『결손가정 아이들의 문제와 탄광지역의 어려움을 일반인들과 연결시키는 가교역할을 교회가 담당해야 한다』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면서『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잘견뎌내고 있으며 어른들도 신앙을 갖고 있는 경우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 비신자들보다 강하다』고 설명,『교회는 문턱을 낮추고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이곳 사람들을 다독거릴 수 있는 안식처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올바른 분배보다 생산성향상을 위한 어른들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너무 일찍 세상의 슬픔을 맛보아야 하는 가난한 우리의 아이들,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세상의 어떤 모습까지 보여 줘야 하는가?
성탄과 연말연시를 알리는 화려한 네온싸인과 요란한 캐롤이 난무하는 도심의 거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이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오늘,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기쁨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할 뿐이다.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나 후원에 관한 문의처는 다음과 같다.
▲ 사북ㆍ고한 탄광지역 사회복지센터=(0398)591-5217 이수자 수녀
▲ 사북본당 사제관=(0398)592-2817 김한기 신부
▲ 대철 베드로의 집=(0398ㆍ)591-2604 김혜경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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