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출현과 격렬한 교리논쟁은 공의회를 소집, 정통 신앙을 옹호하게 했는가 하면 때마침 대거 출현한 교부들을 통해 교리의 연구나 신학을 크게 발전시키는 효과도 아울러 가져왔다. 이때만큼 많고 저명한 교부 학자들이 나온 적이 없다. 교회의 주요한 교부들은 모두 이 시기 사람들이고 그래서 교부의 황금시대로 불린다.
교부는 그 언어에 따라 그리스교부와 라틴 교부로 대별된다. 각기 4명의 대학자가 이 시기에 나왔는데 그리스계는 아타나시오, 바실리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이고, 라틴계는 암브로시오, 히에로니모,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이다. 라틴계의 처음 3명은 삼성(三星)으로도 불린다. 그레고리오만은 다음 세기의 인물이어서 그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물론 교부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적지 않다. 사회의 엘리트이며 고등교육을 받았고, 어려서 가정의, 특히 어머니의 신앙교육의 영향을 받았고, 교직 활동을 했고, 철학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위대한 저술가이고, 주교 사목자이고, 한때 수도생활을 했거나 거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등이 그 두르러진 점이다. 사소한 예외가 없지 않으나 우리는 이런 특징들을 통해 교부 학자의 이상형을 생각해낼 수 있을것 같다.
그리스 교부
아타나시오(약295-373)는 알렉산드리아(이집트)에서 출생, 328년 이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그의 일생은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투쟁으로 일관한 수난의 역사이다. 그 때문에 그는 여러 번 주교직에서 추방되고 유배되어야 했다. 그의 많은 저서중 「안토니오의 전기」는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서방에 소개하고 보급시킨 점에서 특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아타나시오 신경」은 그가 지은 것이 아니고 작가 미상의 후기 작품이다.
바실리오(약329-379)는 카파도치아(소아시아)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수학한 후 교직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고 370년에 체사레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저서중 수도회 규칙은 그후 동방지역에 유일한 규칙서로 오늘날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330-390)는 바실리오와 고향도 같고 공부도 아테네에서 함께하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었다. 아리우스 이단과 사제직에 관한 서한들을 남겼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약344-407)는 안티오키아(시리아)의 귀족 출신으로 수도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얼마나 강론을 잘했던지 역사는 그에게 금구(金口)란 별명을 붙였다. 39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여성의 사치를 공격하는 등 엄격한 설교로 황후의 미움을 사게되어 403년 면직ㆍ유배되었다. 그의 저서중 사제직에 관한 것은 고대교회의 사제상을 반영시키고 있는 점에서 특기될만 하다.
라틴교부
암브로시오(약339~397)는 갈리아의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신도 지방장관이 되었다. 374년 모든 사람이 놀라는 가운데 주민들의 환호로 일약 밀라노 주교로 선출된 그는 8일 동안에 세례에서 주교품까지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설교와 저술, 사목과 조직력 등을 통해 교회에 전적으로 봉사했다. 황제의 조언자로 폭도 7천명을 학살케한 테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공개 속죄까지 시켰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마음을 두지않고 사목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주교직과 사목에 충실했다.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을 앞세웠다. 그는 특히 유명한 찬가(讚歌, Hymnus)들의 작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감사노래로 애창되는 찬가(Te Deum)는 후기의 것이다.
히에로니모(약347~419/420)는 달마시아(유고슬라비아)출신으로 방랑을 좋아하며 지식을 넓혔다. 로마에서 수학한후 안티오키아에서 성서공부를 하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까지 배웠다. 사제가 된후 다마소 교황을 도왔고 또 그로부터 성서의 라틴역을 위임받았다. 교황이 사망하자 로마를 떠나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했다. 이어 그곳에 남녀 수도원을 세우고 그 근처에서 35년간 연구생활을 통해 방대한 저서를 남겼고 불가타(Vulga ta, 통속적)로 불리는 성서의 라틴역도 완성시켰다. 히에로니모는 다혈질이란 성격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수도자적 신심과 함께 교부 중에서 최고의 석학이었다.
아우구스티노(354-430)는 북아프리카에서 외교인 아버지와 열심한 신자 모니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교리교육은 받았으나 세례는 받지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고, 한때는 마니교란 이단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간의 어머니의 많은 눈물이 주효했든지 마침내 그는 387년 암브로시오의 영향을 받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어 396년부터 35년간 히포의 주교로 봉사하다가 반달족이 그의 주교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아우구스티노는 당시 아프리카를 휩쓴 마니교, 도나루스주의, 펠라지우스주의와 맹렬히 투쟁했다. 특히 원죄를 부인한 펠라지우스 이단과 대항하여 유명한 은총론을 전개함으로써 「은총의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미로(迷路)에서 구해낸 은총을 찬양하면서 「고백록」에 남겼다. 또한 유명한 신국론(神國論)을 통해 중세 역사철학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노야말로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천재이다. 그의 사람됨과 그 역사적 의의, 후세에 그리고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는 그 영향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어서 결코 과소 평가가 되거나 간단하게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고대사에서 우리에게 제일 알려진 인물인 동시에 가장 위대한 학자이다. 그는 중세문화를 창조한 위대한 인물의 하나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오기까지 중세의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을 주름잡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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