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목에서는 예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쏟는 관심과 사랑이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이끌고 양육해야 할 유대아인들의 무관심과 경직된 태도,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강도적인 심보가 대조적으로 설명된다.
그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이리들의 약탈감으로 내버려 두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는 무책임성과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양의 우리가 되어 안전하게 양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목자로서 우리밖에 있는 다른 양들로 불러들이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임무를 완수하신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생명의 빵이다」 「나는 생명수이다」 「나는 빛이다」라고 떠들더니 지금은 또 자기 스스로 양떼를 다스리는 문이라느니 착한 목자라느니 하며 자기네들을 모욕하는 이 사람을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은 자칭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라고 자부하던 유대아인 지도층이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고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르러서는 이 사람이 분명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목숨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착한 목자」의 대목은 9장의 배내소경의 치유기적 이야기(나는 빛이다) 대목과 함께 장막절기간의 가르침과 다음에 있는 봉헌절기간의 가르침을 연계하는 연결고리역할을 한다. 9장에서는 눈뜬 사람과 소경을 주제로 유대아 지도층을 경고하였고 이번 장에서는 금방 말한대로 「착한 목자」와 「가짜 목자」를 주제로 그들을 경고하신다.
이 대목을 시작하는 예수의 말씀은 『정말 잘 들어두어라』로 시작하는데 이 번역은 「진실히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의 새 번역이다. 이것을「이중 아멘」의 어법이라 하는데 예수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실 때 쓰는 어법이다(요한 3, 11 : 5, 19).
예수께서는 양우리로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했는데 하나는 양의 목자요 또 하나는 담을 넘어가는 도둑이나 강도이다.
「우리」라는 말은 호메루스 문학에서 가축농장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집뜰을 가리켰다. 여기서 양우리는 집앞 뜰에 돌담으로 둘러쳐졌고 이리떼 등을 막기 위하여 지붕을 나무가지로 덮은 가축장을 연상하면 된다. 우리를 들어가는데 딴 데로 넘어 들어간다고 했지만 원문대로는 「딴데를 올라가는 사람」이다. 이것은 아마도 진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시면서 양떼들의 참 사목자가 되신데 비하여 십자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민족의 구원자임을 자처하는 가짜 메시아들을 가리키려고 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유다스를 도둑이라고 했고 (요한12, 6) 반란을 일으켜 사형선고를 받은 바랍바를 강도라고 하였으며 (마르 15, 7), 성전에서 사람들을 사기쳐 먹는 장사치들을 강도라고 매도하였다(마르 11, 17). 이상 도둑, 강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이름밑에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유대아의 지도자들은 이미 배내소경을 취급하는데서 백성의 행복과 안녕을 돌보는데 마음을 쓰지 않고 하찮은 율법준수문제를 들어 자기들의 입장을 세우고 권세를 부리는데만 부심하고 있음이 들어났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참으로 자기 양들을 생각하는 목자와 양들의 안녕은 생각치도 않고 자기 탐욕에만 골몰하는 가짜 목자와는 판이하게 구별된다. 참된 목자는 양우리의 정문으로 들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양우리의 문지기가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고 했는데 이 대목은 실제 영상과는 잘 맞지 않는듯 싶다. 양의 우리가 집마당에 있고 거저 돌담으로 가려져 있는 상태에서 문지기가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곤란하다.
이 기술은 아마도 요한복음사가가 이 단락을 쓰면서 양우리를 교회로 생각하며 썼기 때문에 일것이다.
하여튼 목자는 양우리에 들어가서 양들을 불러내어 목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것이다. 양들이 자기의 사랑하는 친자들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데리고 나온다. 우리가 강아지를 키우면서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처럼 착한 목자는 양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양치기생활의 관습이다. 그들은 「긴 귀」「흰 코」등 사랑스러운 이름을 붙였다. 그 많은 양떼에서 일일이 이같은 이름을 붙였을까하는 의구심이 일어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목자가 양들에게 쏟는 사랑의 정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런 의구심을 심각하지 않다.
강아지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 듣듯이 양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양치기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우직하게 따라간다. 그들의 매매하는 소리는 안정되고 행복한 심성을 나타내는 소리일 것이다. 목자는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 앞장 서서 그들을 목적지로 데리고 간다. 양떼를 이끌고 가는 목자상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메시아의 영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모세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가서 그 땅을 바라다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죽게 될것을 미리 알고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모든 중생의 목숨을 다스리시는 주 하느님, 이 공동체를 앞장서 갈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로하여금 사람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 가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공동체가 목자없는 양처럼 버려져서야 되겠습니까!』(민수27, 16~17). 에제키엘서는 흩어진 양떼를 하느님 직접 인도하여 시냇가 좋은 목장으로 데리고 갈것이라고 예언하였다(34, 11~16).
그러나 양들은 낯설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산산이 흩어진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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