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생활의 기원
고대 교회사에 관해 이제 수도생활의 탄생과 교계제도의 완성과정을 서술하고 끝내려 한다.
완덕에 이르고자 복음의 권고에 따라 재산과 결혼, 그리고 자아(自我)를 단념하는 금욕생활은 이미 사도시대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고유한 신분을 이루고 제도화되기에 이른 것은 3세기에 와서이다. 수도생활은 처음에 혼자서 하는 은수생활로 시작되어 여럿이 같이 살며 하는 공주(共住)생활로 발전했다. 은수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안토니오이고 공주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파코미오이다.
안토니오(약251~356년)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한후 20대 청년으로 복음의 부자 청년얘기에 감동된 나머지 부유했던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주님의 권고대로 몽땅 처분했다. 그리고는 고향 근처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고 마침내 테에베 사막으로 은둔했다. 잠자리는 거적 아니면 땅바닥이었고 식사는 하루에 한끼, 그것도 빵과 소금과 물뿐이었다. 이렇게 그는 악마와 그리고 자기자신과 싸웠다. 미구에 그의 주위에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은수자 부락을 이루었다. 물론 안토니오의 조언을 구하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안토니오는 105세까지 장수했다. 사막에서의 극도의 극기생활이 그를 그렇게 장수케 했을지 모른다.
파코미오(287~347년)도 이집트 출신으로 처음에는 은수생활을 하다가 320년경 나일강변 타벤니시에 수도원을 세우고 공주생활을 시작했다. 그 수도원은 많은 오두막집들을 담으로 둘러막은 것이었다. 여기서 폐쇄나 격리를 뜻하는 수도원이란 말이 유래했다.
파코미오는 7개의 남자 수도원과 2개의 여가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수도원과 수도자들은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서로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수도생활은 이집트로부터 동방 전역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바실리오는 수도생활을 위한 규칙서를 만들었고 그것은 곧 동방 전역에 보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방은 아타나시오에 의해 처음으로 수도생활이 소개되었고 이어 압브로시오, 히에로니모,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장려되었다. 또한 투르의 마르티노와 요한 카시아노는 수도원도 세웠다. 그러나 서방의 수도생활은 다음 세기에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이 나음으로써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되었다.
수도생활은 순교에 못지 않게 전 세계의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평화가 오자 박해시대의 최고의 완덕이었던 순교정신이 기도와 극기를 통한 완전한 헌신생활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붉은 순교 대신에 녹색 순교가 등장한 셈이었다. 뿐더러 세속을 떠나는 수도 생활은 세속으로 향하는 당시의 국가교회에 대한 견제 역할도 했다.
■ 교계제도의 완성
이 시기에 본당, 성직자의 독신제, 수도 대주교, 총대주교, 교황의 수위권 등이 새로 발생 또는 크게 발전함으로써 교계제도가 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본당은 5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도단이 커지고 많아지자 주교들만으로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게다가 지방과 농촌에는 많은 신도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사제의 독신제는 동서방이 좀 다르게 발전했다. 동방에서는 사제가 된 성직자에게는 결혼을 금했으나 부제 때 이미 결혼한 사람에게는 사제 서품을 허용했다.
반면 서방에서는 사제의 결혼이 4세기부터 교회회의와 교황들의 훈령으로 금지됨으로써 독신제가 입법화 되었다.
수도 대주교직과 총대주교직은 로마국가의 행정조직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했다. 그런데 이직책들은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언급되고 있으므로 그전부터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주(州)의 주교들이 그 주의 수도대주교를 중심으로 뭉침으로써 수도 대주교직이 발생했다. 수도(관구)대주교는 관구회의를 소집, 주재하고, 공석 주교의 선출을 유효확인하고 성성하는 등 일종의 우위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발전의 최고 단계가 총대주교직이었다. 니체아 공의회는 이러한 직책의 관습적인 권한을 인정하면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주교에게 로마 주교와 같은 총 대주교적 권한을 인정하고 또한 예루살렘 주교를 명예 총대주교로신임했다.
그런데 330년 제국의 수도가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겨지면서 총대주교직이 새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천도로 새 로마 즉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영향력이 커졌고 마침내는 동방의 모든 총대주교들을 누르고 상위를 차지하게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 도시의 주교에게 로마 주교 다음가는 명예적 지위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발전은 마침내 342년 사르디카교회회의에서 아타나시오의 복직 문제를 둘러싸고 서방과 동방의 주교들이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방 주교들은 아타나시오의 복직을 지지한 반면 동방 주교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퇴장했다. 이러한 분열은 그후 깊어만 갔다.
서방의 총대주교는 로마 주교 하나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총대주교를 포함하여 모든 주교들에 대해 우위를 요구하는 수위권으로 발전했다. 물론 그러한 요구는 이미 전시기에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특별히 발전했다.
이 시기의 교황 중 다마소 교황과 레오 교황은 수위권을 강력히 주장하고 관철시킬 수 있었다. 특히 레오대교황은 단성론 이단과 관련 에우티케스를 지지한 에페소 교회회의를 강도회의로 단죄했고 칼체돈 공의회에서는 그의 사절들을 통해 정통신앙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레오 교황은 이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로마 주교와 같은 권한을 인정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또한 레오 교황은 새 민족들의 침입에 대항하여 로마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교황의 지위가 일층 확고해졌다. 이리하여 교회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