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 부분은 예수님의 간절한 청원의 백미다.
우주의 역동성과 인간의 일상사를 통합하고 계신 예수님의 영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로부터 땅에로의 길에서 교차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도 구원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에 힘입어 신앙인도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실존적인 변화가 촉진된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뜻’이 요청하는 것들을 깨닫는 마음의 눈과 영혼의 귀가 열려 그 뜻이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스며들게 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정형화되는 사회현상 앞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딜레마에 봉착한다. 창의적 사고와 휴머니즘적 연대보다 경직된 획일주의와 도피성 개인주의가 대세다. 첨단사회가 낳은 편리주의는 인간의 영적 영역에 그늘을 드리우고 내면에 대한 통찰을 가로막는다. 인문학적 활자보다 영상매체를 통한 사회문화에 노출된 성장기 세대들의 철학능력은 퇴화하고 있다. 고유하면서도 다양해야 할 개별 인간의 상호 교류와 사회정의의 순환은 경계심과 배타성에 막힌다.
상대적 박탈감 속에도 과도한 소비문화는 합리화되고 신앙인 각자가 안고 있는 복음의 생활화(토착화)도 요원한 실정이다. 듣고자 하나 듣지 못하고, 정작 들어야 할 것에는 고개를 돌리는 게 다반사인 인생사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 3,17)하는 신앙의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신앙은 난감한 이 현실을 내면으로부터 반전시킬 수는 있는지 자문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주관적 판단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뜻’(voluntas Dei)은 현실에서 식별돼야 한다. 이는 공동체를 통해, 진리와 정의의 삶을 통해, 자연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때문에 개별 인간의 고착된 주관에서 기인되는 존중과 배려의 상실, 공동체적 상생과 공존의 제도적 붕괴는 하느님 나라를 가로막는 장벽이자 위험요소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수행하는 세상의 모든 환경과 문화 안에서 폭넓게 이해되고 수용돼야 한다. 신앙인은 그러한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성숙한 문화와 인간 삶의 질적 향상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를 갈망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신앙인의 복음생활과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깊이 지녀야 할 마음이다.
먼저 움직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섭리의 확장은 당신의 고유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제외될 수 없고 수동적인 방관자도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긴다. 의인뿐 아니라 죄인까지도 회개하고 모든 이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실현된다.
하늘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눈길은 곧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하느님 체험을 향한 내면적 성찰과 공동체와 사회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은 복음적 사고의 깊이를 더해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자연질서 안에서 피조물간의 상호협력, 인간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성장,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통합된 사회공동체에서 구체화된다. 의식 있는 신앙생활로 자신을 일깨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