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끼리 “밥은 먹고 사냐?”는 인사 아닌 인사를 주고받을 때가 있다. “당연히 밥은 먹고 살지!”하며 밥을 사는 여유까지 부린다.
역으로 이런 상황에서 위축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인간관계에 자신감마저 잃는다. 이런 인사를 듣노라면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게 한국인의 정서인가 싶다.
어느새 먹고 사는 게 삶의 전반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나보다. 누려야 할 행복감마저 사치가 아닌가 싶고, 먹고 살아야 하는 전쟁같은 현실을 거부할 수 없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신앙인도 현실적인 가난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질 않아서 부담스러울까마는 가진 게 있어야 성당에 나간다는 항간의 속설은 적잖이 찜찜하다.
일용한 양식을 위해 청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마저 백지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영적 식별이 필요하다.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마태6,8 참조) ‘오늘’ 필요한 양식을 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신다.
과연 오늘 양식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지 의구심에도 겸손되이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마음이 실존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예수님은 꿰뚫어보고 계신다. ‘오늘’은 ‘영원’으로 이어진 시간의 다리이다.
그래서 날마다 허락하시는 ‘오늘’에 집중하라고 하신다. 일용할 양식에 비친 ‘오늘’을 대면하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carpe diem) 는 명대사가 겹쳐진다.
교부들은 ‘일용할 양식’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기르는 참된 양식이며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고 의미 짓는다. 구원의 성찬인 이 양식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영적 생명력을 받아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구원의 성사인 성찬례에서처럼 일용할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승화된다. 물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하루치 양식의 의미도 포함된다. ‘양식’은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 모두를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필요한 양식을 청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러한 청원기도가 얼마나 현실적이며 절박한 지 알 수 있다. 최소한의 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강대국들의 경제소비와 낙후한 제3세계의 절대빈곤이 공존하는 세태는 언제 종식될 것인가.
제자들부터 예수님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충만할 수 있는 청원기도를 바쳐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의 첫 번째 관심사는 하느님의 일에 관한 것이고,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고 믿는다.
신앙인이 오늘 청하는 진정한 양식은 안전한 미래를 보장하는 풍부한 재물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다만 ‘오늘’ 필요한 것을 청한다.
인간의 본성은 많은 것을 원하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필요마저 나누는 사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제자로서 지녀야 할 신앙인의 영혼이다. 제자에게는 필요충분조건이며 나눔과 절제와 겸손의 덕을 빛나게 한다. “생명의 빵”(요한 6,48)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시며 사셨다.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선뜻 내어놓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요한 6,9참조) 절실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