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성지 성당에 걸려 있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을 담은 그림.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회장으로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는 삶을 산 순교자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인은 본래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지녀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 가정에서부터 신앙을 체득해오던 성인은 끝없는 노력을 통해 성격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 노력으로 후에는 사람들이 성인이 원래부터 온순한 성품을 지닌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복자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한 성인은 신자들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 서울에 정착했다. 하지만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날로 심해져 가산을 버리고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마침내 성인은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만들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특히 가난한 중에도 끊임없이 나누면서 살아가, 교우촌의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또 늘 교리를 공부하고 자녀들과 신자들에게 가르쳤기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 지역에 사는 신자들도 찾아오곤 했다.
최양업 신부는 이때의 성인 모습을 회고하며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얻었다”면서 “그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성인이 전한 ‘하느님의 사랑’은 말에서 그치지 않았다. 회장직을 맡은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돈을 모아 옥에 갇힌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줬다.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안장하기도 했다.
성인의 사랑 실천은 자신을 잡으러 욕설을 퍼부으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갔다. 성인은 포졸들에게 요기를 하고 쉬어갈 것을 권했고,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포졸들에게 아침상을 푸짐하게 대접하고 나서 서울 포청으로 끌려갔다.
성인은 다른 신자들보다도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아들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문이 날로 강해져, 성인의 팔과 다리 뼈가 어그러질 정도였다.
성인은 1839년 9월 12일 옥중에서 “예수께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이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뤄졌다”고 말한 뒤 숨을 거뒀다. 순교 당시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수리산성지
수리산성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는 성인이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며 생활하던 자리다. 성지에는 성인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문의 031-449-2842 수리산성지, www.surisan.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