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에서 잘못에 대한 용서 부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청원기도가 조건문과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전제하신다. 이 조건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조건을 이행했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청원을 올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 조건부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살 속에 박힌 아픈 가시처럼 남아 있다.
하느님은 당신 은총을 되는 대로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줄 때에만 우리가 그분을 거슬러 범한 죄의 짐을 기꺼이 떠맡아 주신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받게 되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 서로의 잘못으로 인해 파생된 그릇된 상황을 극복하는 새로운 수용이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에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가장 큰 은총일 것이다. 죄는 삶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양상이다. 자비와 화해를 선사하시는 하느님을 뒤로한 불신과 반목, 원한과 분노는 인격을 손상하고 삶의 가치를 실추시킨다. 우리의 경험상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안다. 궤양성 종양과도 같은 죄를 깨끗이 치유해 줄 의사를 필요로 하면서 어떠한 사례를 할 능력 또한 없는 처지다.
하느님 홀로 의사가 되시며, 그분은 기꺼이 우리 죄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해 주신다. 결국 이 기도는 종말을 상기시키고 있다. 자신의 죄는 그때에 다시 확인될 것이므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희망한다. 무지와 무의식으로 행한 죄와 타인에게 전달된 걸림돌도 용서받아야 한다. 용서에 대한 희망은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자비로 이끈다.
성 요한크리소스토모와 치프리아노 같은 교부들은 세례성사로 죄를 용서받았지만 이후로도 날마다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날마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믿는 이들만이 바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양육하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나날이 용서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이들의 기도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세례 이후에도 계속해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용서에는 이미 나에게 끼친 타인의 모든 허물도 용서한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이 약속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준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 또한 가장 큰 죄가 된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잘못한 모든 이도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용서는 바로 하느님의 정의이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을 닮고 그분을 만난다. 하느님과의 계약의 성취는 회심과 용서하는 기도, 그리고 이에 따른 행위뿐이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이라는 긍정적인 정신과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이라는 부정적인 정신이 상반될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기다리신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은 한없는 자애로 다가온다. 세상에서 화해와 친교가 활발할 때 주어지는 은총임을 언제나 신뢰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용서는 치유의 법으로 정립된다.(마태 6,14참조) 여기에는 아무런 빈틈도,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이 말씀을 확고하게 보완한다.(마태 18,23-35참조) 이러한 정신의 법이 깊숙이 자리 잡아 그 생활을 다스리지 않으면 진실한 믿음이란 무력해진다.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1코린4,4)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를 어려워하지만 용서에 대하여는 신속한 그리스도인의 영은 샘물처럼 맑다. 참된 하느님의 자녀요, 가히 예수님의 제자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