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이다. 죄의 위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일상적인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통상적인 뜻만은 아니다. 우리는 유혹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우리는 유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확고함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는 특별한 유혹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막에서 몸소 체험하신 것과 같은 유혹이다. 즉 배신에 대한 유혹, 하느님을 배척하라는 것이다. 유혹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를 등지고 탐욕과 불의에 굴복함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유혹을 받으셨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게쎄마니에서 번민하실 때에도 제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셔야만 했다.(마태 26,41 참조)
모든 것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제자의 기도 또한 진실하고도 간절해야 한다. 유혹에 맞설 수 있을지, 또는 악마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을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 흔들림 없이 살고 있다면, 때마다 자주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신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
일상에서의 유혹들은 사회 심리적 경향에 편승하여 전해진다. 이는 독단, 과도한 사리사욕, 자기중심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의지의 포기, 절망의 상태를 띤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영적 투쟁을 거쳐 부정적 감정(시기, 미움, 분노 등)에서 벗어나 승화시키지 못할 때,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확장되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악’의 개념에 귀착된다.
아직도 아버지의 나라가 진전이 없는 이유는 악의 세력이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완전히 분쇄될 때까지 사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총체적 악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루카 18,27 참조)
희망차게 시작된 기도가 암울한 어조로 끝나는 분위기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성을 띠며 하나하나의 간구가 각별한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주 이 기도를 마음 깊이 숙고해야 하며, 그 기도의 정신이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와 같은 정신으로 가득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바쳐야 할 기도의 척도이기에 그렇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한마디에 우리의 모든 청원이 포함된다. 악에서 벗어나 구원된다면 더 이상 청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얼마나 그릇되게 바쳐왔던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타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주저하면서 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나의 죄 사함과 평안을 청했는지 말이다.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상습적인 거짓말과도 같다. 주님과 조건부 계약을 맺는 청원기도는 말 그대로 하느님께 ‘제가 용서했으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다. 다른 이의 죄와 잘못에 대한 관용은 곧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길이다.(시편 51,19 참조) 그리고 상대적 인격을 넘어 세상(공동체)의 상처와 아픔까지도 통찰하게 된다.
비로소 “악에서 구하소서”하는 마지막 청원은 주님의 기도를 요약하며 하느님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탄원을 완성시킨다. 하느님 나라는 다양한 현실과 구체적 상황에서 파생되는 악한 경향들을 부단히 식별하고 치유해 나갈 때 그 상징성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부활의 영성은 끊임없는 관용과 영적쇄신의 지평을 넓히려는 내적 자유에서 꽃핀다.